대한민국 육군 최강의 부대로 알려진 백골부대는 북한의 도발에 최초로 보복포격을 가한 북한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한민국 육군 부대로 알려졌습니다. 올해로 부대 창설 68주년을 맞는 백골부대는 대한민국 전군 유일의 DMZ 완전작전으로 명성이 높으며, 타 육군 메이커 부대에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패기와 용맹이 대단한 부대입니다. 




대한민국 육군 메이커 부대 중에서 역사와 전통, 자부심, 3박자를 모두 갖춘 백골부대, 제3 보병사단의 전설적인 일화들과 고 박정인 장군의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은 다가오는 호국보훈의 달에 북한의 기관총 도발에 100배로 갚아준 백골부대 박정인 장군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백골부대는 1973년 북한군의 기관총 도발에 포격으로 대응하여 북한군 GP를 완전히 초토화시킨 이후부터 북한군 전방 부대에게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입니다. (절대 과장이 아닙니다!)



1961년 박정인 장군이 전방 연대장으로 복무할 때의 일입니다. 당시에 군사분계선의 분위기는 북한군이 마음대로 들락거릴 정도로 아군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장면을 몇 번이나 직접 목격한 박정인 장군은 해당 중대장에게 "적이 군사분계선을 넘어오는데 왜 가만히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일선 중대장과 대대장의 대답이 정말 어이가 없었는데.. "북한군을 건드리면 보복하기 때문입니다."였고, 화가난 박정인 장군은 일갈을 날렸습니다.


"대대장의 총과 무기는 목숨을 걸고 조국의 땅을 지키라고 준 것이다."

"그게 대한민국이 당신을 무장시킨 유일한 이유다. 우리 지역에 침투하는 적은 즉각 사살하거나 포로로 하라."



이후 군기확립을 위해 박정인 장군은 '백골용사 선서문'을 제정하여 부대 행사나 장병 전출입 신고 시 큰 소리로 낭독하도록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백골용사 선서문>

1. 백전백승의 백골사단 용사임을 영광으로 삼는다.

2. 죽음을 무릎쓰고 명령에 복종하고 책임완수로 조국과 민족에 충성한다.

3. 모든 법규를 준수하고 전우를 사랑하며 모든 일은 '전투기준'으로 생활한다.

4. 훈련을 실전 삼아 일당백의 전기를 연마한다.

5. 화랑도 정신으로 실지를 회복하여 통일조국을 후손에게 물려준다.

6. 죽어서 백골이 돼도 조국의 수호신이 되어 민족사에 이름 석자의 명예를 남긴다.



이후 박정인 장군은 군사분계선을 수시로 넘어오는 북한군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부대내 특공 소대를 편성했는데,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북한군이 군사분계선을 또 넘어왔고, 사단 수색중대가 이에 대응사격을 하면서 양측이 교전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이때 편성된 특공 소대가 일시에 투입되어 대응을 하였고 부상을 입은 북한군 5명을 생포하기에 이릅니다. 



북한군 5명이 포로로 잡히자 북한군은 곧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추가 도발을 계획합니다. 이때 상황을 지켜보던 박정인 장군은 확성기를 들고 북한군을 향해 "올 테면 와라!, 전차로 증강한 1개 연대가 대기하고 있다."라고 외쳤습니다. 이후 박정인 장군의 강단에 전차로 증강했을 거라는 예상을 못했던 북한군은 겁에 질렸고, 포로가 된 북한군을 포기하고 그냥 돌아갔습니다^^



이후에 백골부대 사단장이 된 박정인 장군은 6.25 전쟁이 끝나고 사라진 '백골' 구호를 다시 부활시켰고, 총검술 훈련 중 부대원들이 남쪽을 향해 훈련하는 것을 보고 "왜 부모가 계신 남쪽을 향해 총검을 휘두르느냐, 김일성이 있는 평양을 향해 총검술 훈련을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또한 훈련장에 화장실 소변통이 남쪽으로 설치되어 있는 것을 모두 북쪽으로 바꾸는 등 이처럼 박정인 장군은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무장된 최고의 군인이었고, 그의 소신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군인이었습니다. 


1973년 3월 7일, 오후 1시 20분, 그가 백골부대 사단장으로 있을 때 긴급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철원 비무장지대에 표지판 보수작업을 마친 후 귀대하던 백골부대원을 향해 북한군이 기습 총격을 가했습니다."


이 도발 때문에 백골부대원 장교 1명이 사망하고, 부사관 1명이 중상을 입게 됩니다. 보통 이런 상황에는 상부에 상황을 보고하고 지시를 기다리지만...

보고를 받은 박정인 장군은 그 즉시 현장으로 출동하여 도발 중인 북한군들에게 사격 중지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북한군은 이를 거부하고, 백골부대 부상자를 포함한 소대 병력에게 계속 총격을 가했습니다. 


곧 박정인 장군은 이후 백골부대의 전설이 된 결단을 내립니다! <3.7 완전작전>



사단 내 포병대대를 총동원해 보복하기로 마음 먹고, 관측된 북한군 GP를 향해 105mm, 155mm 곡사포를 일제히 발사했습니다. 이때의 포격은 휴전 이후 한국군이 처음으로 북한 지역에 대규모 포격을 가한 사건이 되었고, 박정인 장군은 휴전 이후 최초로 북한군을 향해 포사격을 지시한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대규모 포격으로 놀란 북한군은 사격을 멈추고 일제히 도망쳤습니다. 그의 결단은 북한군에게 당한 아군을 구하고, 수시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도발하던 북한군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부대로 돌아온 박 장군은 부대원들에게 기습 총격을 가하고, 휴전협정을 먼저 어긴 북한군과 김일성에게 군사분계선을 지키는 백골부대의 무서움을 보여주기로 다짐합니다.



그날 사단 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군차량을 총동원하여 보란 듯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군사분계선 남방 한계선 바로 코 앞까지 돌진했습니다. 당시 이 상황이 얼마나 긴박했으면, 김일성은 즉시 전군에 비상동원령을 내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1975년 귀순한 북한군 유대윤 소위의 증언>

"당시 백골부대의 포사격으로 인민군 막사에 있던 북한군 36명이 사망했다. 지금도 북한군은 백골부대를 가장 겁내는 부대"라고 증언했습니다. 



박 장군의 회고록에는 당시 북한군이 단 한 발도 대응 포격하지 못한 것을 지적하며, "북한 공산당은 약자에게 강하고, 강한 자에겐 더없이 약하다."라며 북한이 도발할 때 강력한 응징이 따르면 북한군은 금방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발생한 후 10여 년이 지난 1985년 9월 20일, 함경남도 도민희 회장은 남북 이산가족 평양방문단의 자격으로 평양호텔에 투숙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북한 정치보위부 고위간부가 그를 찾아와 묻기를.. "함경남도 신흥군 출신의 박가 성을 가진 요란한 사단장 요즘 뭘 하오?"라고 물어보면서 증오에 찬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한군군에도 패기와 용기로 북한군의 도발에 즉각 대응을 할 수 있는 군인이 있다는 것을 북한은 그 때 알았을 것입니다.)


박정인 장군은 포격사건 이후로 한 달 만에 군복을 벗었는데, 그 당시 군의 작전명령권은 미군에 있었고, 상부에 보고 없이 북한군에게 공격을 지시한 책임이었습니다. 


2013년 7월 29일 박정인 장군의 인터뷰 내용에는 "괴뢰군은 몇 번이나 도발해도 그만인데 우리는 거기에 대응하면 정전협정 위반이라고 처벌하니 부대의 사기가 어떻게 되겠느냐?" 그래서 내가 본때를 보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사격을 하고 옷을 벗었다. 강하게 나가면 그들은 꼼짝 못한다. 적이 침범하면 즉각적으로 대응해 자기들의 책임 구역을 지켜야 한다. 국가가 준 무기를 가지고 국가가 준 부하들을 데리고 응징해야 한다. 그게 군인이다!




비록 이 사건으로 보직해임 전역을 하게 됐지만.. 그의 결단으로 이루어진 작전은 이후 전방에서 발생한 수없이 많은 북한군의 도발에 가장 성공적이고 모범적으로 대응했던 완전작전으로 전해지면, 대한민국 육군과 백골부대의 전설로 알려졌습니다. 



박정인 장군의 과감하고 즉각적인 대응으로 사건 이후 북한군은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북한의 전후방 사단이 통째로 교체되는 수모를 겪었고, 그 당시 북한 지휘관들이 거의 모두 교체되었으며, 백골부대를 상대하기 위해 3개 사단이 추가로 전방에 더 배치되는 등 북한은 자신들이 먼저 도발을 하고 오히려 전방 경계를 더욱 강화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백골부대의 위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북한이 백골부대를 이처럼 무서워하는 이유는?


1. 선전포고와 같은 강력한 구호! (미친개 몽둥이가 약! 약! 약!)



덤빌 테면 덤벼라! 끝장내겠다!라는 식의 강력한 구호는 실제 북한군이 언론을 통해서 당장 내리지 않으면 보복을 가하겠다고 나설 만큼 백골부대의 패기를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2. 기관총 도발에 즉시 포격으로 100배 대응!



북한군의 기습도발에 의해 아군 사상자가 발생하자, 즉시 현장으로 출동해 일단 사격 중지 요청을 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즉시, 도발 원점 확인과 함께 사단 포병대대를 총동원해 북한군의 도발 원점에 포격을 가해 북한군 소대를 전멸시킨 점입니다.


3. 괜히 침투했다가 일망타진 된 무장공비



1992년 5월 22일 국군 군복 차림으로 위장한 무장공비 3명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곧 백골부대 수색대와 정찰부대에 의해 순식간에 일망타진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5.22 완전작전으로 월남전을 제외한 국군의 작전에서 최초의 을지무공훈장 군인을 배출한 작전으로도 유명합니다. 


4. 북한 도발에 대응 우수부대 (7.16 완전작전)


1997년 7월 16일, 또 한 번 북한군이 군사분계선을 넘는 도발을 하는데, 3.7 완전작전에서 박정인 장군이 사단장으로 있을 때 대패했던 부대 소속의 북한군 14명이 중동부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오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당시 23분이라는 시간동안 국군과 북한군 사이에서 300여 발의 소총과 포사격에 의한 교전이 발생했는데, 아군은 한 명의 피해도 없이 북한군 3명 사망, 2명이 중상을 입는 등 양측 교전에서 대승을 이룹니다. 


이 사건은 3.7 완전작전 이후 북한군의 같은 부대가 또 한 번 백골부대에 참패하자 북한군 해당 부대의 간부들이 모두 숙청당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는 이후 귀순한 북한군 장교의 증언에 의해서 밝혀졌습니다


5. 도발을 해도 백골부대만은 피하자!



백골부대에 의해 여러번 대패한 북한군은 1997년 7.16 완전작전 이후 2001년 군사분계선 월경 사건 1회를 제외하면 백골부대가 주둔한 철원 일대는 단 한 번도 도발한 일이 없습니다. 이는 북한군 사이에서도 백골부대는 일부러 피해서 도발한다는 것을 그동안의 파주나 연천 일대의 사건들을 보면 일부러 백골부대가 주둔한 곳은 피하는 듯한 모습을 확실히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처럼 박정인 장군의 군인정신은 지금도 백골부대의 전통으로 그대로 남아 국군 최고의 메이커 부대이자, 북한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국군 부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치며.. 2015년 8월 4일 DMZ 목함지뢰 매설 사건은 북한군이 DMZ를 침범, 목함지뢰를 설치하여 국군이 피해를 입었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DMZ의 국군의 작전 개념은 '저지'에서 '격멸'로 전환되었습니다. 남북 군사 충돌은 분명 큰 피해를 가져옵니다. 전쟁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되지만, 그들의 도발로 국군과 민간인의 피해가 발생한다면 결코 당하기만 하는 일은 앞으로 없어야 하겠습니다. 



"북한군이 기관총을 쏘면 우리는 대포로 적을 응징하는 것이 군인의 임무다."

-백골부대 전설 고 박정인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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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창군이래 가장 큰 업적을 이룩한 제6 보병사단 청성부대.


"죽을 수는 있어도 질 수는 없다."

오늘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꾸어 놓은 세계 육군 역사에 남을 업적을 이룩한 제6 보병사단 '청성부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6사단 청성부대는 1948년 4월 29일 서울 은평구 수색동에서 창설된 '조선 경비대 제4여단'이 시초였습니다. 그 후 2개월 뒤인 6월 14일 충북 충주에서 지금의 제6 보병사단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사단으로 승격된 뒤, 강원도 원주에서 주둔하였고, 이후 춘천지역 일대의 38선 경계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때 사단장이 '김종오 사단장'입니다. 



그는 북한군의 남침이 의심되자 이에 대비하여 주둔 지역의 진지 공사와 병사들의 군사교육, 전투훈련 등으로 만일의 사태를 대비했습니다. 6.25 전쟁 시작과 함께 국군의 대부분 부대가 북괴군에게 개전 초기에 섬멸되거나 후퇴했던 것과 다르게 김종오 사단장이 이끄는 6사단 청성부대는 북괴군의 남침에 미리 대비하였기 때문에 이후 상상할 수도 없는 큰 업적을 세우게 됩니다. 


제6 보병사단 청성부대의 전설적인 업적



한국 전쟁 발발 당시 북한군의 병력은 국군의 약 2배였으며, 전쟁 물자 역시 이미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은 남침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북한군의 남침전략



북한군 1군단이 서부전선에서 서울을 점령한 후, 2군단이 동부전선에서 춘천을 점령하고 수원으로 진격하여 서울에서 후퇴한 국군의 주력부대 후미로 돌아 차단한 후, 1군단과 앞뒤에서 포위하여 섬멸하는 전략입니다. 



6.25 전쟁 하루 전, 6월 24일 당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그동안 유지했었던 국군의 비상경계령을 해제시켰습니다. 때문에 장병들의 외출과 휴가로 전선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개전 초기 북한군의 물량공세에 국군은 맞서 싸울 인원조차 부족한 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김종오 사단장은 6사단장에 부임한 후 전쟁이 임박했음을 직감했고 전선에서 장병들의 휴가 대신 군사교육과 정신교육, 방어 진지 공사를 함으로서 개전시 북한군들을 맞아 잘 싸울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1. 춘천 전투의 업적 


6.25 전쟁 발발과 동시에 완전 무장한 북한군의 기세에 당시 국군의 다른 사단들은 패배와 후퇴를 거듭했지만, 6사단 천성부대는 홀로 후퇴없이 춘천지역을 사수하며, 밀려오는 북한군들을 모조리 격퇴시킵니다. 더 가공할 일은 1개 사단이 북한군 1개 군단을 맞아 싸우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오히려 역습을 감행하여 더 큰 피해를 입히는 등 용맹함과 대범함까지 보였습니다. 



북한군의 원래 계획대로라면 북한군 2사단 병력이 춘천과 가평을 경유해서 후퇴하는 국군을 포위한 후 섬멸 작전을 펼쳐야 하는데 당시 청성부대가 미리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군 2사단의 계획은 실패합니다. 

이때 북한군 2사단은 7연대 자주포까지 대동한 기갑부대를 투입하여 청성부대의 방어 진지를 뚫으려 하지만 오히려 청성부대 특공대의 육탄 화염병 공격에 자주포는 파괴되고 말죠.  

이때 운용되었던 자주포가 북한에서 지금도 운용 중인 SU-76 자주포입니다^^



이렇게 북한군 2사단의 계획이 실패한 후, 7연대까지 대패하자 북한군은 무리수를 둡니다. 사단 예비전력인 17연대까지 합동하여 청성부대의 방어선을 뚫으려고 했는데, 오히려 청성부대에 의해 2사단 전력의 40%가 궤멸 당합니다. 



당시 국군의 상황을 알아보면, 

완전 무장한 북한군에 비해 병력과 장비는 너무나 열악하였고, 국군의 사단 규모 자체도 1만여 명이 안되는 수준이었습니다. 탱크를 앞세워 돌격해오는 북한군과 다르게 전투에 대한 개념 자체도 부족한 실정이었지만 6사단 청성부대는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북한군의 남침 전략의 전반을 흔들어 놓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이렇게 6사단 청성부대가 막강하게 대응하자 북한군 2군단장 김광협은 6사단을 포위하여 완전히 섬멸하기 위해 홍천으로 향하고 있던 12사단과 603 모터싸이클연대를 회군시켜 청성부대가 주둔한 춘천 점령을 명령합니다. (북한군 2군단장 김광협의 판단은 이후 2군단의 몰락의 원인이 되죠.)


북한군 12사단이 2군단과 합류하여 공격해오자 청성부대는 큰말고개와 원창고개에 다시 방어선을 만들고 싸웠는데, 이때 북한군 병력과 함께 전차 10여 대를 다시 격파하면서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또한 김종오 사단장의 명령으로 북한군 12연대를 맞아 싸우고 있던 국군 2연대를 지원하러 보냈던 16포병 대대는 북한군 12사단이 회군하자 12사단과 603모터싸이클부대를 역습, 화력을 쏟아부어 궤멸시켜버리는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청성부대의 활약으로 북한군의 남침전략이 틀어지자 북한군 7사단이 2군단과 합세하여 다시 춘천 공략에 나서자 당시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전선의 단절과 청성부대가 고립, 섬멸될 것을 우려하여 김종오 사단장에게 전략적 후퇴를 명령하였고, 결국 7월 1일 6사단은 춘천을 북한군에게 내어주고 충주로 후퇴합니다.



당시 상황을 다시 종합해보면, 개전 후 이미 수도가 함락되었고, 국군의 주력부대가 패퇴한 상황에서 6사단 청성부대는 중동부전선에 홀로 남아 남하 중인 북한군 전력의 반을 소멸시켜버렸습니다.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6사단 청성부대는 북한군 2군단에 비해 엄청난 열세를 알 수 있습니다. 기계화는 커녕 제대로 된 장비도 없는 상태였고, 병력 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는 차이를 보였으며, 소련에서 지원받은 장비로 무장한 북한군을 상대로 이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춘천 전투에서 양측 피해 현황만 살펴봐도 6군단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습니다. 편제도 제대로 안 된 상황에서 김종오 사단장의 지휘 아래 춘천, 홍천, 인제 일대에 구축한 방어선으로 북한군 1개 군단(2군단)을 6사단 혼자서 궤멸시켰습니다. 결국 UN군의 상륙과 부산으로 진격하는 북한군의 주력 부대의 남하를 지연 시킴으로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꾸어놓는 전과를 올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한 달 뒤, 1950년 11월 25일, 중공군의 개입 



북한군의 전세가 기울어지자 중공군 대규모 개입으로 국군과 연합군은 1.4후퇴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 해 4월 공세에서 사단은 화천군 사창리 전투에서 중공군을 맞아 싸우다가 방어진지를 포기하고 후퇴를 결정, 대패하게 되죠. 

그 후 김종오 사단장의 교통사고로 장동영 장군이 6사단자에 임명되었고, 6사단을 다시 재편성하여 용문산을 주 방어선으로 하여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하였습니다.


중공군에게 참패 이후 이를 갈던 6사단은 이후 용문산 전투에서 6.25 전쟁뿐 아니라 세계 육군의 역사에 남을 최고의 전과를 올립니다.


당시 장도영 사단장은 청성부대 3개 연대 중 1/3 병력인 2연대를 주 방어선보다 전방인 북한강 인근에 배치하는데 부족한 병력으로 뭉쳐서 싸워도 질 것이 뻔했는데.. 오히려 병력의 1/3을 전방 정찰조로 보내다니.. 2연대의 전투력을 믿었던 것일까요? 


3. 용문산 전투의 업적 


그림처럼 6사단 19연대는 서쪽 방어, 7연대는 동쪽에서 방어선을 지키고, 2연대는 전방에 나가 북한강을 마주보고 방어리인을 배치했습니다. 곧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2연대 예하 1대대와 2대대는 중공군을 공격하였고, 곧 후퇴하여 후방 427고지로 후퇴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점은 1개 연대가 3개 사단을 상대로 공격과 후퇴를 했으면, 이후 당연히 후방의 본대에 합류하여 싸워야 하는데, 2연대는 무슨 이유에선지 427고지에서 후퇴하지 않고 중공군 3개 사단과 예하 포병대의 총공세를 막아내고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점은, 6사단 2연대가 완강하게 버티자 중공군은 2연대의 방어라인이 6사단 주력부대의 주 방어라인으로 착각하여, 모든 병력(3개 사단)을 총동원하여 2연대를 공격했습니다. 


이때, 후방의 주 방어선에 있던 6사단 7연대와 19연대는 잽싸게 중공군의 후미로 돌아 포위하여 반격을 시작합니다.



당시 중공군들은 자신들의 총 병력인 3개 사단을 앞에서 방어하고 후미에서 국군의 거센 공격이 이어지자 자신들보다 많은 병력이 공격해 온다고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는데, 결국 3개 사단 병력이 1개 연대에 막여 패주하는 꼴이 되었고, 중공군은 양평에서 춘천 그리고 화천까지 무려 80km를 도망만 치다가 화천저수지에서 모두 전멸하고 맙니다. (세계사에 총이 생겨난 이래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방어작전 사례로 알려짐.)



결과적으로 용문산 전투는 1개 사단(대략 1만 명)이 적 1개 야전군(대략 10만 명)을 궤멸시킨 전투입니다. 6사단 청성부대가 왜 국군 최고 사단인지 알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세계 육군의 전설, 6사단 청성부대의 업적을 정리하면,


1. 국군 최초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음 (6사단 7연대 예하 2대대가 북한군 15사단 48연대를 섬멸시킴)

2. 6.25 전쟁 최다 업적 (154회 전투 / 92,669명 사살 / 6,437명 포로)

3. 국군/UN군 최초 압록강 입성

4. 전군 유일 38선 방어 성공

5. 북한군 1개 군단 전투력 상실(춘천 전투)

6. 1개 사단으로 1개 군단 급을 궤멸 시킴 (총기 탄생 이후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방어작전)

7. 제2 땅굴 발견

8. 최초로 보병 육탄공격으로 적 전차 파괴


이처럼 6사단 청성부대의 모든 업적을 한 단어로 줄이면,, '전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치며, 이제 얼마 뒤면 6월입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조국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호국영령들과 참전유공자들의 헌신을 기억하는 6월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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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해마다 엄청난 규모의 국방비를 해군 전력 증강에 쏟아붓고 있습니다. 현재 중국 최초의 국산 항공모함이 4월에 진수예정에 있으며,  최근에는 미국의 대형 강습상륙함인 와스프(WASP) 급을 모방한 중국 역대 최대 강습상륙함 건조에 착수했다는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의 보도가 있었습니다. 



▲미 해군의 와스프 급 강습상륙함


중국 해군의 강습상륙함 Type 075는 영토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에서 유사 시 적 함정이나 잠수함, 육지의 지상군을 공격할 수 있는 다양한 헬기를 탑재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Type 075로 명명된 건조 중인 중국의 신형 강습상륙함은 2020년에 중국 해군에 실전 배치할 목적으로 미 해군의 와스프 급과 동일한 만재기준 4만 톤급으로, LHD(Landing Helicopter Dock) 걸맞게 도크가 있는 헬리콥터 항공모함으로 최대 30대의 헬기의 탑재가 가능하며, 함미에는 고속 상륙정이 출입하는 도크를 갖출 것으로 관측되고 있습니다. 



건조 중인 Type 075의 30대 헬기 탑재 능력의 규모를 비교하자면 미 해군의 와스프 급의 40대 탑재량과 거의 대등한 수준이며, 일본 해군이 보유한 최대 규모의 헬기항모 이즈모의 탑재 헬기 14대와 비교하면 상당한 우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일본 해군의 이즈모 헬기구축함


이로써 중국은 Type 075 건조가 완료되면 헬기강습상륙함을 자국 해군 최초로 보유하게 되며, 경항공모함의 임무도 함께 수행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리고 중국 해군은 지금도 기존에 보유하고 있는 해군 전력을 질적으로 근대화시키는 중이며, 2020년까지 자체 제작한 항공모함과 구축함, 호위함, 상륙정 등 해군 전력을 계속 증강시켜 나갈 계획입니다. 


▲중국 해군의 신형 강습상륙함 Type 075



현재 중국이 보유한 강습상륙함 Type 071


현재 중국 해군은 6척의 도크형 상륙함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만재배수량 20,000톤 급의 유자오급은 현재 실전배치한 상륙함으로 미국의 샌 안토니오급과 유사한 외형을 가지고 있으며, 특이하게도 스텔스 기술이 적용된 중국의 대표적인 상륙함입니다. 또한 중국에서는 최초로 헬기를 탑재할 수 있는 상륙함이며 최대 4대의 헬기를 운용할 수 있습니다. 




Type 071은 외형에서도 알 수 있듯이 헬기의 탑재가 4대가 최대이기 때문에 현대적인 초수평선 상륙작전을 수행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을 받아 왔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건조를 시작한 Type 075가 차후에 실전 배치되면 헬기 30대를 탑재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 해군으로서는 그동안 자신들이 취약점으로 생각했던 부분이 완전히 해소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Type 075의 모델이 된 미국 와스프 급 상륙함



와스프급 강습상륙함은 만재배수량 41,335톤으로 미 해군의 주력으로 현재 총 9척의 강습상륙함이 운용 중에 있으며, 헬기와 수직 이착륙기와 3대의 고속 상륙정을 탑재할 수 있습니다. 후속함인 아메리카 급은 총 11척 건조 예정이며, 현재 1척은 건조가 완료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 해군 본험 리처드 함


그리고 한반도 유사시 가장 먼저 도착할 와스프 급 6번 함인 본험 리처드 함은 중국의 Type 075 신형 강습상륙함이 실전에 배치되면 미래에 남중국해 또는 동중국해의 해상에서 조우할 확률이 높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해상에서의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현재 중국 해군의 주축, 랴오닝 항공모함


▲중국 해군의 랴오닝 항공모함 편대


중국은 현재 라오닝 항공모함을 실전 배치 중에 있으며, 지난해 동중국해에 이어 서태평양까지 전개하여 해상훈련을 진행하였고, 실제 훈련 기간 동안 항공모함 편대의 구축함과 젠-15함재기와 함재 헬기 등을 이용해 실탄 훈련을 실시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 중입니다. 


랴오닝 항공모함 제원

만재배수량 67,500톤

길이 302m, 폭 70m

최고속도 53km/h

작전기간 45일

승조원 2,600명

최대 함재기수 68기



특히, 2017년 4월에는 중국의 국산 최초의 항공모함 진수가 예상되고 있어서 최신 강습상륙함의 건조와 계속 건조 중인 각종 함정의 실전 배치는 세계 2위의 해군력을 목표로 하고 있는 중국 해군의 욕심이 서서히 채워져 가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중국은 그들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꾸준히 해군의 전력을 증강시고 있으며, 그들의 욕심이 태평양에서 미국과 대등한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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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언월도, 큰 쇠자루의 끝에 달이 누운 듯한 도(刀)를 용이 물고 있는 모습을 한 '대도류 병장기'로 무기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벌써 머릿속으로 삼국지의 관우를 떠올리고 계실지 모르겠네요 ^^. 멋들어지게 흘러내린 흰 수염을 흩날리며 한 손에는 청룡언월도를 쥔 관우의 모습은 강함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영웅들과 그들과 운명을 함께 했던 무기들은 많이 있지만 대도류 병장기는 동양의 무기가 가지는 신비로움과 함께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 어떤 힘이 존재하는 거 같습니다.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관우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무인들 중에 현대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캐릭터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니고 있는 80근(48kg)에 달하는 청룡언월도 역시 그의 캐릭터와 가장 잘 어울리는 '필살 아이템이'이죠.



중국의 청룡언월도는 80근인데 이걸 어떻게 휘둘러?


명나라의 병법가 모원의도가 말하길 "청룡언월도는 기예의 웅장함은 보여줄 수 있으나 전장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80근이나 되는 무게 때문인데.. 

80근으로 말하자면 48kg 정도의 무게입니다. 이것을 전장에서 자유자재로 사용할 정도라면 체격이나 힘이 일반인들보다 배는 되어야지 가능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단지 관우라서 가능했던 것일까요?



그런데 실제로 우리 역사에서 실존하는 인물 중에 관우 못지않은 청룡언월도의 고수가 3인이나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실제로 더 많은 무인이 청룡언월도를 사용했지만 오늘은 그중에 가장 유명했던 고수 3인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그럼 지금 저와 함께 우리 역사 속의 청룡언월도의 고수를 찾아 함께 떠나보겠습니다. 



청룡언월도!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에 의해 전파되다

그런데 무게가...


하지만 전장에서 조선의 일반 무장들이 사용하기에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무게였습니다. 한 번 휘둘렀다가는 자신도 함께 날아갈 정도였으니까요..

이쯤 되면 아무리 좋고 멋진 무기라도 뭔가 변화를 줘야겠죠?


당장 무거운 장식과 크기를 줄이면서 파워가 조금 약해졌지만 대신 도의 날은 더욱 서슬이 퍼렇고 가볍게 제작되어 적과 조우했을 때 이 병기를 휘두르면 적들의 간담이 서늘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후 조선 후기의 무관들은 일본의 왜검을 수련하였고, 기병은 청룡언월도를 이용한 마상월도(馬上月刀)를 수련하였습니다. 




본격!

한국사 속의 청룡언월도 고수를 찾아라!



제1 고수, 효종 (1619~1659) 


내 기필코, 이 굴욕을 갚고야 말테다. 

이 조선을 부강하게 만드리라.


조선 제17대 왕이며, 인조의 차남으로 병자호란 이후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서 8년 동안 수모를 겪으며 볼모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귀국 후 소현세자가 돌연 사망하자 효종이 세자에 책봉이 되는데 1649년 즉위하여 '삼전도의 굴욕'과 인질 생활의 굴욕을 갚고자 북벌을 주장하며 군제의 개편과 군사훈련에 올인하게 됩니다.



▲유물로 남아있는 효종의 청룡언월도와 철퇴

그는 그와 뜻을 함께하는 무관들과 북벌을 위해 기병과 조총수, 살수를 양성하는데 모든 전력을 기울였으며, 오직 북벌만을 생각하면서 자신 또한 언월도와 철퇴를 들고 무공 수련에 온 힘을 다 쏟았다는데..


그런데 저 무겁기로 소문난 언월도와 철퇴를 들고 어떻게 수련을 했을까요? 

보통 임금이라면 유약하고 심약하고.. 그런 느낌이잖아요?




타고난 무골, 피맺힌 한


무장들도 휘두르기 어려운 청룡언월도를 들고 말을 달릴 정도로 효종의 체격이나 힘은 장사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군제를 개편하고 그 오랜 시간 동안 왕인 자신이 직접 언월도를 들고 무공 수련을 하며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마도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아버지 인조의 굴욕을 두 눈으로 지켜본 아들의 피맺힌 한이였을 거 같습니다.





제2 고수, 장조 사도세자 (1735~1762) 


조선의 검신, 김체건과 

당대 최고의 무술가들에게 배우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능했던 그는 위에서 언급했던 고조부인 효종을 빼다 박았다고 할 만큼 무인의 기질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습니다. 

어릴 때는 매우 영민하여 아버지 영조에게 무한 사랑을 받았지만 차츰 공부와는 담을 쌓았고, 사춘기 소년마냥 무예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의 주위에는 당대 제일검으로 불렀던 검신 김체건과 최고의 무술가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쉽게 말한다면 왕이 될 사람이 무인의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 



이런 환경에서는 누구라도 당연히 무술을 좋아할 수밖에 없겠죠. 더구나 14세 어린 나이에 고조부의 청룡언월도와 철퇴를 들고 무술 수련을 할 만큼 타고난 무골이었고 이미 어린 나이에 상당한 무공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협지로 이야기한다면 천하제일검 스승의 몇 갑자 내공을 전수받은 제자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거 같군요^^ 


그리고 만에 하나 그가 죽지 않고 왕이 되었다면, 고조부 효종의 북벌의 정신이 깃든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만주 벌판을 달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랬다면 조선의 영토는 만주지역까지 이르며 지금은 중국과 대등한 국가로 발전하지 않았을까 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봅니다.




▼무사 백동수의 백동수역(좌), 여운역(우)


제3 고수, 백동수 (1743~1816)


강한 조선을 꿈꾸었던 조선의 협객


우리 역사에 존재했던 무술 고수들 중에는 무협지에 등장해도 될 만큼 뛰어난 무인들이 많습니다. 그중에는 '최고의 무사' 타이틀에 항상 포함되는 인물들이 있는데 오늘 소개해드리는 한국사 속의 청룡언월도 고수 3인 중 마지막 인물인 무사 백동수가 그 주인공입니다. 


조선 후기의 무인으로 기병술, 활쏘기 등 다양한 무예에 소질이 있었고, 당시 조선의 검신으로 불렀던 김체건의 아들인 검선 김광택에게 검술을 배웠던 인물입니다. 검신의 아들 검선에게 무술을 전수받았다면 그의 무공 수위가 얼마나 높았을지 짐작할 수 있을 거 같네요.



조선 기병 무기의 최고봉! 청룡언월도


강한 조선을 지향했던 백동수는 무예가 뛰어났던 장교 몇 명과 함께 당시 군영마다 달랐던 무예 기법들을 기병 무예 18가지와 마상무예 6가지로 합쳐 '무예도보통지'를 만들었으며, 전국 팔도의 군영에 훈련 교범으로 보급합니다. 

최근 방영했던 드라마 '무사 백동수'에서는 검술에 관련된 영상이 대부분이었는데 실제 무사 백동수는 청룡언월도를 이용한 마상월도의 고수 중에 고수였다고 전해집니다.


마상월도(馬上月刀)

말을 타고 달리면서 월도를 사용하는 기법으로 조선의 기병들이 필수로 익혔으며, 무예도보통지의 그림 중 유일하게 수염을 기른 시연자가 있는데, 일반 무사들이 쉽게 펼칠 수 있는 기예가 아니기 때문에 그가 바로 백동수라고 지금까지 추측하고 있습니다. 



오늘 준비한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도전하는 국가는 창대하고 안일한 방법으로 살려고 한 국가는 쇠퇴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인류 역사가 보여주는 진리인 거 같습니다. 

'평화는 우리 힘이 강할 때만 보장된다'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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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을 완전히 장악한 이오시프 스탈린의 욕심은 끝이 없었습니다. 핀란드와 불가침조약까지 맺고 있었던 그는 1939년 11월 30일, 대규모 전력을 동원하여 그동안 눈여겨봤던 핀란드를 침략했습니다. 소련과 핀란드 간의 겨울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소련은 급속도로 공업화에 성공하면서 자신들의 공업기술에 상당히 자신감을 가졌었고 이 전쟁에서도 다양한 신무기들을 대거 등장시켰습니다. 이때 등장했던 무기들은 바로 전장에 투입되어 사용되었는데, 이론적으로는 월등한 성능을 발휘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실제 소련군이 사용했던 신무기들은 대부분 망작으로 통할 만큼 허당스러운 무기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무기들이 프랑제 르노 FT-17 경전차를 대체하기 위해 개발한 T-26A 전차와 또 하나의 망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경전차와 40mm 포탑을 장착한 BA-6 장갑차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T-26A 전차


T-26A 전차는 상부에 기관총 2기를 탑재했지만 서로 간의 간섭으로 인해 사각이 270도로 한정된 문제가 있었고, 핀란드와 겨울전쟁 당시 무려 1000대 이상 투입했지만 15mm라는 얇은 장갑은 핀란드 군의 대전차 소총에 너무 쉽게 벌집이 되었고, 기동성 또한 느려서 핀란드 보병이 접근해서 던진 화염병에 석유난로처럼 되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전장에서는 쓸모없는 무기였습니다.  






▲BA-6 장갑차


1936년부터 2년간 386대가 생산된 이 장갑차는 BT-5 경전차에 45mm 포가 탑재되어 생산될 당시만 해도 강력한 파워로 전장을 장악할 거라는 기대를 모았었는데, 강한 파워와 뛰어난 기동성을 기대했지만 눈길에서는 너무나 느린 속도를 낼 수밖에 없었고 얇은 장갑은 소총에 그냥 뚫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처럼 BA-6 장갑차 역시 기대와는 다르게 소련군이 먼저 전장에서 질려버린 무기였습니다. 





소련의 최고 삽질? 허당 무기 NO 1


평시에는 야전삽으로 사용하고 전투 중에는 박격포로 사용할 수 있는 획기적인? 소련의 허당 무기로 원래의 목적은 보병 한 사람이 운용할 수 있는 무기로 설계되어 야전삽의 기능과 함께 전장에서 분대 지원의 역할도 겸할 수 있는 박격포 겸용의 무기였습니다.


▲M1939 박격포


하지만 발사 속도가 너무 느리고, 조준 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정확한 타격이 아예 생각도 할 수 없는 무기였습니다. 여기에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더 있었는데 37mm 포탄은 기껏해야 사거리가 300m 밖에 되지 않았고 적의 철모에 정통으로 맞아야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정도로 화력이 약했습니다. 특히 겨울전쟁 당시 포탄이 눈에라도 떨어지는 날에는 불발 확률이 100%였다고 하니 전장에서 군인들이 포기할 수밖에 없는 무기였습니다.  



거기다 야삽으로서의 가치도 최악을 기록하였는데 겨울만 되면 땅이 돌처럼 얼어붙는 지역에서 야전삽은 이미 있으나 마나 한 물건이었습니다. 결국 소련군 입장에서는 쓸모없는 짐만 더 늘어났을 뿐이었죠. 


▲언 땅에 참호를 만들지 못해 동사한 소련군


이후 M1939 박격포는 독소전에서도 사용되었지만 소련 군부에서도 장난감보다 못한 성능을 인정했는지 1942년 모든 생산이 중단되었습니다. 이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문제가 많은 무기들을 사용했던 소련군은 어마어마한 전력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공업기술력에 대한 자만과 오만으로 결국 큰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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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미국은 10조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하여 20대의 B-2 스텔스 전략폭격기 '스피릿'의 개량작업에 들어간다고 밝혔습니다. B-2 전략폭격기는 '검은 가오리(Black Stingray)', '하늘의 저승사자'라는 별명으로 2조 원이 넘는 가격으로 현존하는 가장 비싼 기종으로 유명합니다. 1989년에 시험비행 이후 노후화된 구식 시스템을 2020년까지 개량하기로 하고 B-2의 두뇌격인 비행관리제어 처리장치를 집중적으로 개량했는데 29일 미 군사 전문매체인 스카우트 워리어에 따르면 2016년 8월에 이미 개량 작업이 완료되었다고 전했습니다. 



B-2는 중간 급유 없이 괌에서 출격해 한반도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다시 복귀할 수 있을 정도로 항속거리가 무려 10,400km이며, 22t에 이르는 무장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뛰어난 스텔스 기능은 적의 방공망을 뚫고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작전 수행이 가능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북한 정권이 가장 두려워하는 미국의 전략무기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컴퓨터 시스템과 비행관리제어 처리 장치가 개량되기 전에도 B-2가 가진 스펙과 실전 경험은 최강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시스템이 1000배나 향상되었기 때문에 어떤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지 굉장히 기대되고 있습니다. 또한 시스템 개량뿐만 아니라 무장에서도 기존에 최강 전략폭격기라는 타이틀이 부끄럽지 않도록 더욱 강력해졌으며, 새롭게 탑재 가능한 무기들은 북한 정권 맞춤형 무기라고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최대 22톤 무장 



1000배 강력해진 두뇌


이미 B-2의 무장 능력은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며, 전략폭격기의 두뇌라고 할 수 있는 비행관리제어 처리 장치가 1000배나 똑똑해졌기 때문에 지상의 목표 표적 탐지 능력은 더욱 향상되었고 이로 인해 더욱 신속하게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으며, 보다 효과적인 타격이 가능하기 때문에 북한 핵과 ICBM에 대한 상당한 억지력을 나타낼 것으로 기대됩니다.   



또한 B-2는 이번에 개량이 완료되기 전에 이미 유고슬라비아 공습작전인 얼라이드 포스 작전과 아프간과 이라크 작전 그리고 미국의 대테러 전쟁등 모든 작전에서 선봉 역할을 하며 적의 방공망을 무력화시키고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핵심 전략 자산 등을 파괴하는 등 그 성능과 능력에 대해서는 이미 검증이 완료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번에 1천 배의 성능 향상이 더욱 기대가 됩니다. 




더 강력해진 무장


B-2 스피릿은 초기 전력화했을 당시부터 막강한 무장 능력으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500파운드 급 합동정밀직격탄(JDAM·GBU-30) 80발과 2000파운드급 JDAM(GBU-32) 16발, GPS형 관성유도 폭탄인 JSOW 16발, 장거리 공대지 미사일(JASSM-ER) 16발이 대표적인 무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거리가 확대된 JASSM-ER


기존의 무장력만으로도 가공할 능력을 발휘하지만 이번에 개량이 된 이후로는 JASSM-ER은 1000km로 사거리가 확대되었으며, B-52 전략폭격기만 운용할 수 있었던 신형 장거리 핵 순항미사일 (LRSO), 미니 핵폭탄 B61-11, 차세대 핵폭탄 B61-12을 장착할 수 있게 개량되었기 때문에 강력해진 두뇌 못지않게 무장 또한 막강하게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B-2 향상된 최신 무장


①신형 장거리 핵 순항 미사일 (LRSO)



LRSO는 B-52 전략폭격기에만 장착했던 공중발사 순항미사일(ALCM)을 대체한 것으로 이제는 B-2에도 탑재할 수 있어 촘촘한 적 방공망 밖에서 작전 수행이 가능해졌습니다. 



② 북한 전용 소형 핵폭탄 B61-11



위 이미지는 2011년 B61-11 소형 핵폭탄을 B-2에서 투하 시험 중인 모습입니다. B61-11은 걸프전 당시 지하시설에 있는 대량살상무기들을 파괴하기 위해서 지하 관통형 핵폭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현재는 B-2의 개량으로 탑재가 가능하게 되어 북한 지하에 숨은 주요 시설물과 지휘부 타격용으로 안성맞춤인 핵폭탄입니다. (6m까지 뚫고 들어갑니다.)



③ 북한 전용 차세대 디지털 핵폭탄 B61-12



미 공군은 현재 B-2 전략폭격기용 전술핵무기로 4종(B61-3, 4, 7, 10)을 사용 중에 있지만 개량이 완료된 B-2에는 가장 첨단화된 디지털 레이더와 GPS를 장착한 B61-12 폭탄으로 통일하기로 하였고, 파괴력이 50kt에 불과하지만 오차 범위가 30m 정도로 놀라운 정밀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지하에서 파괴력이 더 상승하며, 북한처럼 촘촘한 방공망과 지하시설이 많은 곳을 타격하는데 큰 효과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이렇게 그동안 북한 정권과 김정은 위원장이 가장 두려워하는 B-2 스텔스 전략폭격기가 더욱 그 성능이 향상되어서 돌아왔습니다. 1천 배 향상된 성능과 더욱 강력해진 무장은 북한으로서는 또 한 번 고민과 공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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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저격수들이 추천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격총 TOP 7

스나이퍼, 저격총은 밀리터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무기입니다. 이런 부분은 실제 전투가 아닌 게임에서만 봐도 유저들의 저격총에 대한 관심이 상당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게임이 아닌 실전에서 적에게 심리적인 공포를 주거나, 적의 요인 암살, 전투시 아군 보병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후방 지원, 테러 저지를 위해서는 고도의 인내력과 훈련, 뛰어난 사격술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전쟁터에서 많은 경험을 했던 저격수들이 추천한 유명한 저격총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저격총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저격총의 종류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볼트 액션식과 세미 오토식, 풀 오토식, 대물 저격총으로 나누어집니다. 


① 볼트 액션식 저격총


한 발의 탄을 쏜 후, 다시 장전을 하고 쏘는 저격총입니다.

탄을 쏠 때마다 다시 장전을 해야 하는 부분이 단점일 수 있지만 이러한 부분은 이 저격총의 장점인 파괴력과 높은 정확도를 생각하면 재장전의 단점은 아주 작은 단점이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장점으로는 총의 구조가 매우 단순하여 잔고장이 거의 없으며 유지, 보수가 쉽습니다. 

역시 저격의 꽃은 '원샷 원킬'입니다. 이런 장점 때문에 저격수가 가장 선호하는 저격총입니다.


② 세미 오토식 저격총


세미 오토식 저격총은 저격총이지만 연사력이 뛰어납니다. 이런 부분이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탄의 수가 많고 반동이 적은 저격총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확도와 파워 부분에서는 확실히 볼트 액션식 저격총과 차이가 납니다. 반동이 적다고 하나 이는 총 구경에 따라서 차이가 납니다. 우스개소리지만 게임에서도 세미 오토식 저격총을 사용하면 원샷원킬이 안되는 경우가 많죠^^

전투에 있어서 여러 상황들을 마주하게 되는데 세미 오토식 저격총은 초정밀 사격보다는 후방 지원시 총의 장점이 더욱 부각되겠습니다.


③ 풀 오토식 저격총


이 저격총은 거의 실패한 형태로 생각됩니다. 세미 오토식 저격총의 단점을 보완하고자 개량을 했지만 저격수들 사이에서는 거의 사용을 하지 않는 저격총이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드리겠습니다. 


④ 대물 저격총


대물 저격총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전차 공격용으로 만들어진 T-Gwehr이 대물 저격총이 조상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당시에는 큰 목표물이나 대전차 등을 타깃으로 삼았기 때문에 총의 파괴력을 키우려면 당연히 반동이 커지고, 이 반동을 흡수하기 위해 총의 크기도 커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전장에서 거의 사라졌다가 최근 다시 전장의 환경이나 기술이 바뀌면서 다시금 휴대성이 좋아져서 새롭게 등장합니다. 


여기까지 "저격총의 종류"에 대해서 설명드렸고, 

지금부터는 오늘의 주제인 "실제 저격수들이 추천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격총 TOP 7" 입니다.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공부하는 중이기 때문에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PGG-1 


높은 명중률로 유명한 저격총입니다. 하지만 이 총의 가장 큰 단점으로는 탄창 수가 5발이며, 스코프를 교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6배율 조준경이 붙어있지만 이는 근거리 사격시 유용하기 때문에 여러 나라의 군에서는 거의 사용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경찰특공대, 대테러부대 등에서 사용합니다. 



방식 : 세미 오토, roller-delayed blowback 

구경 : 7.62 x 51mm NATO (.308 Win)

전체길이 : 1208mm

무게 : 8.0kg

유효사거리 : 600m






2. M-24 


미군이 사용하고 있는 저격총으로 굉장히 저확도가 높은 총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볼트 액션식이기 때문에 고장이 적고 전장에서 사용하기에 아주 유용합니다. 이러한 장점 때문에 미군은 이 저격총에 대한 신뢰도가 매우 높습니다.


방식 : 볼트 액션

구경 : 7.6mm

전체길이 : 1092mm

무게 : 5.49kg

유효사거리 : 800m





3. DRAGUNOV 


AK소총의 Variation 중의 하나로 총열을 길게 만들었으며 변화된 개머리판을 사용합니다.

이 저격총의 장점으로는 AK소총의 장점을 그대로 가져와셔 우수한 내구성으로 높은 신뢰도를 자랑합니다. 

특이한 점으로는 총구에 대검을 장착할 수 있다고 하네요 ㅎㅎ.. 저격총에 대검이라니..




방식 : 가스자동식/회전노리쇠방식/반자동

구경 : 7.62mm x 54R

전체길이 : 1255mm

무게 : 4.31kg

유효사거리 : 1000m






4. VARRET (Barret M82 대물저격총)


미국의 육군, 공군, 특수부대 그리고 세계 여러 국가에서 사용하고 있는 대물저격총으로 이 저격총은 파괴력이 너무나 우수해서 엄폐한 적이나 경장갑차량을 직접 타격하여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폭발물 제거에도 사용되고 있는 저격총으로 파괴력이 아주 우수한 저격총입니다. 



방식 :  Short recoil operation(숏 리코일), semi-automatic(세미-오토매틱)

구경 : 25 x 59 mm

전체길이 : 1168mm

무게 : 15kg

유효사거리 : 2500m






5. GHEYTAC


스나이퍼 영화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바로 알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영화 '더블 타켓'에서 주인공인 마크 월버그(밥 리 스웨거)가 사용한 저격총으로 '저격병 잡는 저격총' 이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이 있습니다.



방식 : 볼트 역션

구경 : 408 cheytac 

전체길이 : 1400mm

무게 : 12.3kg(탄창없을 시), 14kg(탄창, 소음기 장착 시)

유효사거리 : 2500mm





6. SSG-69


명중률이 매우 높으며 가격대비 성능이 우수하고 매우 튼튼하기 때문에 많은 나라에서 

군대 또는 특수부대의 저격총으로 채택하여 사용 중에 있습니다. 


방식 : 볼트 액션

구경 : 7.62x51mm NATO / .243 Winchester / .22-250 Remington 

전체길이 : 1140mm

무게 : 3.9kg

유효사거리 : 600m 이상






7. L96A1


영국의 해병 특경대가 사용하는 라이플입니다. 

이 총의 가장 큰 장점으로는 웬만해서는 고장이 안나는 신께서 내린 내구성을 자랑합니다. 

대한민국에서는 해군 특수전여단, 경찰 특공대, 707 특수임무대대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방식 : 볼트 액션

구경 : 7.62 NATO (.308 Win) 

전체길이 : 1180mm

무게 : 5.9kg

유효사거리 : 800m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공감은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세계 권총의 표준이라고 할 수 있는 글록 권총은 "플라스틱 권총"이라는 새 시대를 열었습니다. 처음 이 권총이 만들어질 때 많은 이들은 단지 플라스틱이라는 명칭이 들어갔다고 해서 별 기대를 안 했지만 단순한 구조와 가벼운 무게 그리고 기존의 권총들이 가지는 한정된 수명(2~3만 발)을 뛰어넘어 지금은 휴대용 총기 시장에서 가장 사랑받는 베스트셀러 권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장점인 휴대성을 너무나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총열이 짧아 사거리와 파워에 문제가 있다는 단점이 지적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사용자들은 오래전부터 글록이 가진 이런 단점들을 극복할 수 있는 카빈 형태의 요구가 있어왔는데, 바로 라이플과 글록 권총의 기능을 가지면서 탄창이 공유되는 형태로 다양한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전천후 기능을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요구는 결국 글록 권총이 최종병기로 다시 한 번 탄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개인 사용자들 외에 특히 대 테러 진압 부대와 경찰 특공대에서는 이러한 요구들이 많았는데, 기존에 사용 중이던 글록 권총과도 당연히 호환이 되도록 설계되어야 했죠. 결국 그런 요구가 받아들여져 탄생한 제품이 아래 CAA TACTICAL RONI CARBINE Conversion Kit입니다. 


CAA TACTICAL RONI CARBINE Conversion Kit 

(CAA CARBINE G1)

영화 '베를린'에서 한석규 씨가 들고 있었던 바로 그 총.

권총을 기관단총으로 만들 수 있는 키트입니다. 



키트에 사용 가능한 권총은 글록 17, 18, 19, 22, 23, 31, 32, 34, 34와 SIG 기종도 여러 가지 호환이 가능합니다.


아래는 키트와 함께 대용량 탄창까지 장비된 모습



이미지 www.caagearup.com



초기에 나왔던 키트는 처음에는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원래의 요구 사항이었던 사거리 연장과 파워는 뒤로하고 너무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에만 충실했는지 실제 경찰 특공대와 대 테러부대에서는 사거리 연장과 함께 보다 높은 파워를 발휘할 수 있는 키트를 원하게 됩니다. 

이렇게 다시 한 번 탄생한 것이 RONI C G2입니다. 


RONI-C-G2

글록과 스프링필드 XD 계열에 호환되며, 총열이 더 연장되고 방아쇠와 앞 손잡이의 거리가 늘어났고 발열을 위한 구멍도 더 늘어난 모습입니다. 



앞 버전인 카빈 G1보다는 확실히 사거리와 파워 면에서 성능 개선이 있었지만 카빈 G1의 단점이었던 노리쇠 부분은 여전히 불편함을 감수해라는 것인지 손잡이 뒤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부분만 개선된다면 최종병기로 진화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아 보입니다. 



길어진 총열과 방아쇠와 손잡이의 거리가 늘어나면서 좀 더 안정된 사격이 가능했지만 글록은 다시 한 번 진화하게 됩니다. 장식과 디자인보다는 현장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발상의 전환을 하게 됩니다. 

필요 없는 장식과 부품들은 모두 탈거 시키고 오로지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 기본에 충실한 최종형태가 만들어집니다. 그렇게 등장한 것이 바로 아래의 MechTech Glock Carbine 9mm입니다. 


MechTech Glock Carbine 9mm

시가전에서는 직접 교전 또는 지원 사격용으로 사용하다가 건물 진입을 할 때는 상부 덮개를 분리한 후 글록 덮개만 결합하면 권총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무에 라이플과 권총의 장점을 모두 살리면서 편의성까지 보완한 제품이죠.

어르신의 엄청난 사격실력



단, 앞서 소개된 모델은 글록 권총을 그대로 결합하여 사용하는 형태지만 카빈 9mm는 글록 상부 덮개를 분리한 후 키트와 결합하여 사용하게 됩니다.



이처럼 글록 권총과 라이플의 장점을 모두 살리면서 현장에서 사용하는 실무자들의 요구에 따라 다양하게 진화하였고, 휴대용 권총의 최강좌에서 휴대용 소총의 영역까지 넘보게 되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공감은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공격 헬기나 경량 무장 항공기는 전장에서 아군의 지상전력에 근접해서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무기입니다. 이때 지상의 보병은 적 항공기의 공격으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전차와 대전차무기의 관계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 지상에 전차가 등장했을 때 보병의 대전차무기는 큰 성과를 보였습니다. 이에 따라 보병이 쉽게 운용할 수 있는 무기로 공중에 날아다니는 적 항공기를 잡을 수 있도록 만든 무기가 바로 휴대용 단거리 대공미사일(MANPADS)입니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대공미사일 중에서도 특이한 생김새만큼이나 특이한 운용개념이 적용된 영국제 지대공 미사일 '스타스트릭(Starstreak HVM)'은 최강 공격 헬기 아파치 가디언 조차도 떨게 만드는 영국 탈레스 방공에서 개발된 보병의 휴대용 단거리 대공미사일입니다.


스타스트릭(Starstreak HVM)


영국에서 개발한 휴대용 지대공미사일 재블린의 후예로 스타스트릭 또한 재블린 특유의 반능동 레이저 유도방식을 채용하였는데,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대공 미사일 중에 가장 빠른 속도를 내며(마하 3.5) 3개의 다트가 미사일에서 방출되어 높은 명중률을 갖고 있는 보병의 지대공 무기입니다. 



독특한 운용개념


기존의 대공미사일이 탄두에 고성능 폭약을 탑재하여 목표물에서 폭발을 일으켜 파편을 사용하는 반면, 스타스트릭은 3개의 화살촉인 '다트'로 불리는 물체가 비행하면서 만드는 고속 운동 에너지와 소형 고폭탄을 이용해 항공기를 타격하여 격파하는 미사일입니다. 



◈ 제원

무게 : 16.82kg

길이 : 1.397m

직경 : 13cm

운용병력 : 1명

유효 사정거리 : 0.3~7km

탄두 : 트리플 다트

탄두중량 : 0.9kg

속도 : 마하 3.5

유도시스템 : SACLOS (반자동 시선유도) 


생긴 것만큼이나 특이한 스타스트릭이 어떤 무기인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보면, 재블린처럼 SACLOS(반자동 시선유도)라는 아주 특이한 유도 시스템을 사용하는데 미사일 발사 후 목표물이 명중할 때까지 조준기로 사수가 계속 조준을 해줘야 하는 단점이 있지만, 적외선 열추적 방식이 아니라 레이저 유도 방식이기 때문에 말만 지대공 미사일이지 실제로는 '육해공 전천후 미사일'입니다. 

또한 적 항공기의 회피기동 시 내뿜는 플레어도 레이저 유도방식인 스타스트릭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적 항공기, 특히 공격 헬기가 지상으로 접근 시 가장 두려워하고 신경 쓰이는 대공무기입니다.  


▲유도장비 에이밍 유니트


대공미사일임에도 불구하고 탱크는 힘들더라도 지상의 경장갑차량이나 적의 방어진지 정도는 쉽게 날려버릴 쉽게 날려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대전차무기나 대공미사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트리플 다트로 알려진 신형 탄두를 사용하는데 이 탄두는 표물을 향해서 마하 3.5의 속도로 날아가 타격하기 때문에 탄두 자체가 가진 운동에너지에 의한 피해도 엄청납니다. 


▲'다트' 소형 고폭 탄두

 

스트스트릭의 원리는 발사된 후 1단 추진체계가 레이저로 유도되어 적 항공기에 근접하게 되면 자동으로 위에 보이는 3개의 다트가 발사되어 목표물을 추적하여 피해를 주게 됩니다. 적 항공기가 회피기동 또는 플레어를 시전한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3발 중에 1발만 명중해도 일단 트리플 다트에 걸리게 되면 소형 고폭 탄두의 피해뿐만 아니라 마하 3.5에 이르는 고속 운동에너지에 의해서 상당한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무서운 보병의 휴대용 단거리 대공미사일입니다. 


▲스타스트릭에 격추되는 공격 헬기



다양한 파생형 (공격 헬기, 장갑차, 험비 등에서 운용)


스타스트릭의 큰 장점으로는 레이저 유도방식과 트리플 다트 외에도 다른 휴대용 대공미사일과 다르게 다목적으로 육해공 전천후 사용이 가능한 점입니다. 신속한 기동력을 살리기 위해 보병 이외에 알비스 스토머 AFV와 소프트 스킨 차량인 험비 등에 장착한 모델은 대공 능력과 함께 적 항공기에 의한 공습에서 상당한 부담을 주는 동시에 직접적인 방어와 공격이 가능하며, 일부에서는 함정 방어용으로도 이용이 가능한 말 그대로 전천후 무기입니다. 


▲ATASK : 아파치 AH-64에서 운용 중인 모습

미군 UH-1 헬기에 실험용으로 사용한 후 탁월한 성능으로 현재 미군 AH-64 아파치 헬기에 채택되어 운용 중에 있습니다.


▲LML : 험비에 발사 플랫폼을 갖춘 모습


▲THOR/MMS : PINZAIGER 차량에 장착한 모습


▲보병의 휴대용 스타스트릭


▲SH HVM : 8연장으로 사용 중인 '스토머 AFV' 


이처럼 스타스트릭은 휴대용 대공미사일로 다양한 파생형이 존재하며, 육해공 모든 부분에서 적 항공기의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영국 육군에서 운용하는 스토머 AFV는 10km 거리 내에서 300m/s로 비행하는 적 항공기를 7km 내에서 레이더로 감지하여 신속하게 요격할 수 있는데, 이게 가능한 것은 발사시스템이 굉장히 빠른 스타스트릭의 최대 장점이기도 합니다. 


저고도에서 100m/s 속도로 비행하는 공격 헬기의 경우 표적 감지 후 10초 이내에 격추시킬 수 있을 정도로 우수한 성능을 자랑하기 때문에

아무리 강한 공격 헬기라도 목표물인 지상 전력에 스타스트릭의 존재를 안다면 싶게 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울뿐더러 두려움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공감은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전쟁의 역사에서 칼과 활은 병사들의 주 무기였습니다. 하지만 총기류의 등장에 밀려 곧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현대적인 신무기가 대거 등장했던 2차 세계대전 당시 총 대신 활과 장검을 들고 전장에서 큰 공을 세웠던 전설적인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에서 '싸우는 잭' 또는 '미친 잭'으로 통했던 '잭 처칠' 중령입니다. 


패기 넘치는 '잭 처칠'의 명대사

"전투에 검을 차고 나가지 않는 장교는 복장 불량이다."



잭 처칠(Jack Churchille)은 1906년 월 16일 영국 출생으로 영국 사관학교 출신으로 1936년 군에서 제대 후 영화배우로 활동하기도 했었는데 그의 특이한 이력에는 1938년 영국군 백파이프 경연 대회에서 2등, 1939년 오슬로 세계 양궁대회에 영국 대표로 나갈 정도로 백파이프 연주와 활 쏘기에 타고난듯 했습니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그는 다시 영국군 장교로 입대하는데 이때부터 특이한 정신무장과 행동으로 전설적인 전공을 세우게 됩니다. 


<전투에서 잭 처칠 중령의 무기> 

백파이프, 영국 장궁, 스코티시 브로드 소드(클레이백)을 총 대신 들고 다녔습니다.


<그의 전투법>

적의 총알이 날아와도 꼿꼿하게 서서 전진하며 자신의 장기인 스코틀랜드의 백파이프를 한곡 연주 한 후 칼을 뽑아 들고 괴성을 지르며 돌격하는 전투법을 사용했습니다^^ 


스코티시 브로드 소드(클레이백)


▲백파이프와 장궁


▲당시 잭 처칠을 그린 그림


그의 활약


▲세계양궁대회에 영국 국가대표로 출전한 잭 처칠



1940년 프랑스에서의 활약 


영국군의 프랑스 원정군에 들어가 싸웠는데, 어느 날 자신의 소대가 매복 중에 독일군 순찰대를 발견하자 잭 처칠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내가 저기 앞에 있는 독일군을 활로 쏴 죽이는 동시에 공격하라" 명령하고는 직접 독일군을 활로 저격해 쓰러트렸습니다. 저격 소총을 사용하면 되는데 말이죠..

이 기록은 2차 세계대전에서 유일하게 활에 의한 적 사살로 지금까지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이후 그는 일반 보병은 스릴이 없고 시시하다고 판단하여 영국 코만도에 자원하여 활동하였습니다. 



▲사진 중앙 지휘봉을 들고 있는 코만도 부대의 잭 처칠


1941년 노르웨이에서의 활약 


잭 처칠은 1941년 12월 27일, 자신이 맡은 코만도스 부대를 이끌고 당시 '양궁 작전(영국군과 노르웨이군의 합동작전)'에 참여하였는데, 지휘관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상륙함에 탑승하여 자신이 탑승한 상륙함이 가장 먼저 도착해서 램프가 개방되자마자 가장 먼저 뛰어내려 총알이 날아오든 말든 자신의 특기인 백파이프 연주 한 곡(당시 연주곡은 '캐머런 남자들의 행진')을 한 후 끝남과 동시에 수류탄을 던지며 독일군 벙커로 차례로 돌격했는데.. 


적 해안포 진지들을 수류탄으로 직접 박살을 내놓고 2시간 후 본부와 했던 통신을 살펴보면,


"해안포 점령 완료!" "아군 피해 거의 없음" "남은 해안포 진지는 지금 폭파하는 중"이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이후 그는 독일군의 해안포 진지를 수류탄으로 전부 폭파했고 그 용맹함과 지휘관으로서 모범이 인정되어 그는 지휘관으로서 십자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상륙작전 중 가장 선두에서 브로드 소드를 들고 앞장서는 잭 처칠


1943년 이탈리아에서의 활약 


잭 처칠은 1943년 6월에 다시 한 번 코만도스의 지휘관으로 카타니아 해변에서 상륙작전에 참가하였습니다. 또 한번 그는 가장 먼저 상륙정에서 뛰어내려 그의 3대 무기인 브로드 소드와 활을 차고 백 파이프를 연주하며 전투에 임하게 됩니다.  


이때 본부에서 모리나 마을에 있는 독일군 관측소를 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자신이 돌격할 때 엄호해줄 소총수 한 명과 단 두명이서 습격해 독일군 박격포 부대를 박살내고 혼자 42명의 독일군 포로들을 잡게 됩니다. 이때 그는 또 한 번 훈장을 수여 받았습니다. 

(그는 브로드 소드를 들고 돌격할 때 항상 '코만도오오~~'라고 외치면 적진을 향해 돌격했다고 합니다.)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1944년 유고슬라비아에서의 활약


잭 처칠은 1500며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과 자신의 코만도스 44명의 대원을 이끌고 브락섬에 상륙했지만 독일군들의 거센 공격으로 1500명의 파르티잔들은 잭과 코만도스 부대원들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이때, 잭은 백파이프를 꺼내들고 44명의 코만도스와 함께 독일군 점령지로 진격했지만, 박격포 공격으로 자신의 부하들을 다 잃고 자신은 수류탄을 까들고 적진에 돌격하다가 수류탄 폭발로 기절하여 포로가 됩니다. 



당시 잭 처칠은 포로수용소에서도 온갖 기행을 일삼았는데 독일군들도 그의 골때리는 행동으로 골머리를 앓았다고 합니다. 호시탐탐 탈출 기회를 노리다가 처음 탈출은 실패로 돌아갔었는데 두번째 시도에서는 수용소 정전이 되자마자 들고 있던 삽을 던져버리고 전력질주로 수용소를 벗어나 도보로 241km를 이동하여 이탈리아에 주둔 중이던 미군에 구출되었습니다^^ 평범한 군인들은 도저히 흉내 낼 수도 없는 일입니다.




1945년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미얀마로 출정


독일군의 포로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는 1945년 일본군들이 전장에서 군도라는 장검을 사용한다는 소문을 듣고 하루라도 빨리 검을 든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버마(미얀마) 원정대에 배속되어 이동 중, 인도에 도착하자마자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놈의 미국만 아니었으면 10년은 더 싸울 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하며 아쉬워할 정도로 전투광이었습니다.



그 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잭 처칠은 팔레스타인 등 해외에 파견되어 코만도스를 지휘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고, 1959년 중령으로 예편한 후 영화배우 활동도 잠시 하다가 1996년 자신의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장에서는 '미친 잭'이라는 별명으로 쏟아지는 총탄을 다 피하며 태연하게 백파이프를 연주하며 장검을 들고 싸웠던 그의 용맹함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공감은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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