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충원의 파월장병 제2묘역에는 일반 병사들과 함께 묻혀있는 장군의 묘가 있습니다. 수많은 사선을 넘으며,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의 한국 영웅인 그는 생전의 유언대로 장군 묘역이 아닌 죽음의 사선을 함께 했던 병사들과 묻히기를 소망했다고 합니다. 진정으로 군인을 사랑했고 조국을 사랑했던 그가 지금도 대한민국 군대와 군인의 전설로 불리는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목사가 꿈인 청년이 장군이 되다


채명신 장군은 1926년 황해도 출생으로 항일운동가인 아버지와 크리스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목사의 꿈을 키우던 청년이었습니다. 하지만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남쪽으로 내려와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군인의 길을 선택합니다. 


▲송악산 육탄10용사


그리고 당시에는 군인들이 발령을 기피했던 제주도 9연대에 배치된 후 그는 군 통솔 철학인 '골육지정의 리더십'을 터득하는데 이 덕분에 그는 형제와 같은 부하들에 의해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는데 이후 송악산 전투와 남파 게릴라들을 토벌하기 위해 태백산에 투입되는 등 군인으로서 성장하게 됩니다.


'필사즉생 골육지정' 

육군 3사단 백골부대의 슬로건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반드시 이기고, 뼈와 살을 다하여 형제처럼 뭉치는 단결력'이라는 뜻입니다.



▲북한 후방지역에 투입되기 전 찍은 기념사진(백골병단)


한국 최초의 유격부대 백골병단의 영웅 


채명신 장군의 활약이 시작된 시기는 6.25전쟁 초기 북한군 후방에 침투하여 게릴라전을 이끌었던 백골병단의 지휘관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에는 제대로 훈련받은 병력도 부족했었고 부대 지휘관 또한 경험이 부족하여 일반적인 작전도 힘든 상황이었죠. 



그러나 북한군으로 위장한 백골병단은 북한군의 점령지로 침투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지금도 채명신 장군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로 소개되는 당시 적 후방을 책임 지던 인민군 63여단을 완전히 궤멸과, 대남 유격부대의 지휘관인 김원팔 인민군 중장을 생포해 사살(자결)하는 등 전무후무한 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한국 전쟁 영웅에서 베트남 전쟁의 영웅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월남전 파병 결정, 하지만 채명신 장군은 개인적으로는 월남전 참전이 '명분 없는 전쟁'이라고 하며 반대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국가의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파병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는 이미 6.25 전쟁에서의 경험을 활용하여 정립한 '중대전술기지'라는 개념을 이용해 '두코 전투'와 '짜빈동 전투'에서 세계를 놀라게 할만한 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중대전술기지 개념도


'중대전술기지' 요약

적의 폭격과 침입에 대비해 2,3명이 들어갈 정도로 원형 구조로 호를 파놓고 거미줄처럼 연결합니다. 밖으로는 철조망, 크레모아, 지뢰 등을 설치하고 안으로는 박격포 진지, 헬기장 등을 설치하여 완전 요새를 구축하여 1개 중대 병력으로 대대 규모의 병력을 격퇴하는 전술기지입니다.



실제 두코 전투에서 채 장군의 맹호소속 9중대는 6배나 많은 북베트남군 2개 대대와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둡니다. 이 전투로 인해서 그의 전술 개념은 전투에서 많은 성과를 올리게 되고 미군은 한국군에 독자적인 작전권을 넘겨주게 되죠!!

그 당시 베트남에서는 채 장군의 '양민과 베트콩 분리 정책'과 '중대기지 전술'을 미군이 사용했더라면 전쟁이 6개월 만에 끝났을 거라는 이야기가 외신에 흘러나올 정도로 그는 뛰어난 전술가였고 지휘관이었습니다.



▼이미지 크리스찬리뷰


전투에서 승리보다는 민간인 보호가 우선!


그는 전투도 중요했지만 전쟁에 시달리는 주민들을 위해서 장병들과 함께 도로 보수, 구호식품 전달 등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의 이런 노력으로 주민들의 마음을 열고 자연스럽게 베트콩과 주민이 분리되었고, 이로 인해 보다 수월하게 광활한 지역을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을 먼저라고 생각하는 그의 모습은 현지 주민들뿐 아니라 그가 거느린 부하들의 마음까지도 단단하게 결속하는 효과를 가져와 부대원들의 전투력 증대에도 큰 힘을 발휘하게 되죠.



▼이미지 출처 - 국방홍보원


함께 싸웠던 파월장병이 묻혀있는 묘역에 묻어달라


그의 회고록에는 "이제는 떠나도 여한이 없다. 다만,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조국 수호를 위해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고 먼저 가신 전우들의 영령들 생각이 항상 마음에 남는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는 전역 후에도 기업으로부터 고액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국가에서 주는 연금으로 생활하는 등 대한민국 군인의 품위를 지켰습니다. 평소에 미국의 1,2차대전에 참전했던 장군이 국립묘원에 병사들과 함께 안장되어 있다는 말에 크게 감명을 받았는데, 



이후 그는 생의 마지막에서 "나를 파월 장병이 묻혀있는 묘역에 묻어달라" 유언을 남기고 2013년 11월 25일 8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 그는 현충원 사병묘역에 그가 사랑했던 병사들과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국방홍보원, 영상-국방부 유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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