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대전차부대가 한국군 보병을 무서워하는 이유


전장에서 보병들이 사용하는 무기들은 다양합니다. 대부분 보병 대 보병의 전투에 필요한 무기들은 기본적으로 소총에 한정됩니다. 하지만 보병대 전차의 전투에서는 대전차무기들이 필요한데 지금부터 북한군 전차들을 사냥할 한국군 보병들의 대전차무기 8종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참고>

보병들이 사용하는 대전차무기란? 전장에서 적의 주력 전차와 조우했을 때, 급히 적 전차를 파괴하기 위해서 공격하거나 적 전차로부터 방어를 하기 위해 운용되는 근접 대전차 전용 무기체계입니다.



1. M27 LAW


현대전에서는 거의 퇴물에 가까운 수준이지만 가볍고 저렴한 장점으로 아직 군에서 사용하고 있는 대전차무기입니다. 

현재 미군에서도 아직 운용되고 있을 정도로 가성비 높습니다.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전쟁 영화에서 자주 보셨을 텐데 람보나 코만도를 아시는 분들은 한 번쯤 보셨을 겁니다. 



M72 LAW이 가성비 갑으로 불리는 이유는 일회용 발사 세트의 가격이 우리 돈으로 90만 원 정도 밖에 하지 않습니다. 

최고의 대전차무기 재블린의 경우 1회 발사 세트 비용이 한화 2억 9000만 원으로 비교 자체가 힘들 정도입니다. 

단, 파괴력이 그다지 높지 않지만 아직 북한군의 신형 전차를 제외한 노후된 전차는 충분히 파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알려졌습니다.





2. M67 90mm 무반동총


20Kg 정도의 무게로 화기 중대에서 전문적으로 운용하고 있는 대전차무기로 베트남전쟁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오래된 구식 무기이지만 북한군을 상대로 사용한다고 했을 때 북한 보병이나 진지 파괴, 대전차무기로 손색이 없다고 봅니다. 



소총수보다 행군시 20Kg의 무게를 더 견뎌야 하기 때문에 사수들의 체력 소모가 상당할 거 같습니다. 






3. M40 106mm 무반동총


무게는 209Kg으로 1/4톤 K-111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데 현재는 우리나라에서는 K-111이후 K117까지 변형되어 나왔는데 지금은 K131 차량으로 거의 대체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퇴역하는 추세입니다.



위 사진은 얼마전까지 일본에서 운용되었던 106미리 무반동총을 60식 장갑차에 탑재한 모습입니다. 

포가 고정식이라서 상하좌우 방향 전환이 안되는데 굳이 달아놓은 이유가 뭔지... 





4. BGM-71 TOW (유선유도 대전차미사일)


토우 미사일은 베스트셀러 대전차 미사일로 가격은 대당 1090만 원으로 매우 저렴하여서 미국을 비롯해서 많은 서방 국가에서 사용하고 있는 대전차무기입니다.

토우 대전사 미사일도 1960년대 등장해서 베트남 전쟁에서 활약을 한 노후된 무기지만 현재 아직까지도 북한군의 얇은 장갑의 노후된 전차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수 있습니다.



특징으로는 유선유도로 유선 와이어를 이용해서 유도 조준하는 화기로 신뢰성이 매우 높지만 유선이기 때문에 적에게 발사 지점을 쉽게 노출시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유선의 한계는 200m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으며 적 전차에 빠르게 기동해서 대응하기 위해 차량에 탑재하여 운용하고 있습니다. 





5. PZF-3 (팬저파우스트-3)


서방의 RPG-7이라는 별명이 붙어있는 대전차무기로 1992년에 만들어졌습니다. 

독일제로 700mm까지 관통이 가능한 성능이 매우 우수 화기로 알려졌습니다. 무게는 13Kg입니다.



관통력이 700mm이기 때문에 이론상으로는 현재 북한군이 보유한 모든 전차를 파괴할 수 있습니다. 

앞서 소개해드린 106미리 무반동총의 대전차 고폭탄으로 400mm를 관통할 수 있는 걸 감안한다면 독일제라서 그런지 대단한 관통력을 자랑합니다.


그리고 가벼운 무게로 여군들도 운용하는데 어려움이 없고, 발사 시 후폭풍을 잡아주는 카운터 매스 장치로 인해 거의 후폭풍이 발생되지 않습니다. 



6. 스파이크 NLOS


이스라엘의 최신형 대전차미사일로 1발 가격은 2억 원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해병대에서 운용 중에 있으며 백령도와 연평도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적의 전차를 파괴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북한의 해안포 타격용으로 유도장치를 이용해 멀리 있는 목표물을 타격할 수 있습니다.



발사 시 4개의 날개가 펴지면서 목표물을 향해 날아갑니다. 사거리는 25Km로 정확도가 매우 높은 대전차무기입니다.





7. Metis-M


1992년에 만들어진 단거리 휴대용 대전차미사일.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발사관 226문과 탄약 12,750발을 도입해 운용 중입니다. (발사관 대당 2억 5000만 원, 탄약 개당 2500만 원)

무게는 불과 14Kg 밖에 되지 않습니다.



Metis-M의 특징은 토우 대전차미사일과 마찬가지로 반능동의 유선유도 방식을 사용하며 저렴한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탠덤 탄두(대전차용 이중탄두) 사용시 RHA 관통력이 PZF-3보다 150mm정도 높습니다.





8. 현궁


대한민국의 첫 국산 3세대 대전차미사일입니다. 유선유도인 토우 대전차미사일과 Metis-M과는 다르게 Fire&Forget방식으로 쏘고 바로 자리를 이동해도 목표물을 정확히 타격할 수 있습니다. 단 현재 한국군에서 운용중인 다른 대전차미사일 보다 가격이 높습니다. (미사일 1발, 1억)



그리고 현궁의 가장 큰 특징 바로 TOP ATTACK 기능으로 조준 발사 시 탄두가 날아가다가 위로 솟구친 후, 적 전차의 취약점인 전차 상부를 타격하기 때문에 현궁에 맞은 전차들은 100%로 파괴됩니다.


[사진과 영상 출처: 국방홍보원입니다!]


끝으로 먼저 소개해드린 대전차무기들은 이미 상당히 노후된 무기들도 있지만 북한의 구식 전차들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

다만 북한의 최신형 전차인 선군호는 방호력이 700mm 이상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북한은 우리가 노후된 대전차미사일을 대체하지 않고 있을 때 이미 자신들의 주력 전차들을 계속해서 개량하고 배치까지 끝낸 상태입니다. 


이제 우리 군도 더욱 최신화된 대전차무기로 무장하고 적 도발시 초전에 박살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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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도깨비 공유의 특별한 군 복무 경력


요즘 연예가에는 대세 남자 배우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핫한 배우가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쓸쓸하고 찬란한神-도깨비'에서 김신 역을 맡아 도깨비로 열연 중인 배우 공유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내용은 그의 연기와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그의 특별한 군 복무 경력에 대해서 지금부터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도깨비 공유는 예전에도 역시 '바른 청년' "


그가 입대 전 자신의 인생 드라마로 불리는 '커피프린스 1호점'이 전 국민적인 큰 사랑을 받으면서 공유는 당시에 가장 인지도가 높은 배우로 지목되는 등 그의 드라마 이후 활동에 대해서 많은 팬들의 기대와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그가 차기작으로 어떤 드라마에 출연하게 될지, 저 뿐만이 아니라 많은 국민과 팬들이 궁금해했습니다.



하지만 최고의 전성기 때 그는 과감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보통 남자 인기 연예인들은 좋은 작품으로 큰 사랑을 받게 되면 그 인기를 이어가기 위해서 군 복무를 꺼려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실제로 그런 이유로 연예인들 중에는 가끔 불법적인 편법을 이용해서 안 좋은 소식으로 뉴스 1면에 올라오는 일도 종종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는 가장 자신이 사랑을 받고 있을 때, 군 입대를 선택합니다



"공유가 공익이었어? NO! 병장 만기제대"


공유는 '커피프린스 1호점'이 종연된 다음 해인 2008년 1월 14일 팬들의 사랑을 뒤로하고 입대합니다.


그는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5주간 기초군사훈련을 마치고 육군 병장 만기제대를 한 평범한 육군 예비역입니다. 

대부분 많은 분들이 여기까지만 알고 계시고 그 뒷이야기는 전혀 모르시는데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공유가 철원에서 군 복무를 했어? YES!"


어떻게 인기 연예인이 홍보지원대원으로 곧바로 차출되지 않고 그 힘든 철원에서 군 복무를 했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으시죠.

홍보지원대의 선발은 보통 연기나, 가수, 방송 등의 경력이 있는 병사들 중에서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는데 군 복무 기간이 6개월 이상 남은 병사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최근에는 선발이 아니라 국방부에서 차출해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도깨비 공유는 거의 군 생활 절반 가까이 철원에서 복무를 한 후 지원을 했습니다.


<참고> 홍보지원대원 (연예병사를 말합니다)



여기서 잠깐 부연 설명을 드리자면 연예인이라고 무조건 국방부 홍보지원대원으로 선출되는 것은 아니고 5주간의 기초군사훈련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은 후 지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원과 함께 서류와 면접에 합격해야지 선출되는 방식입니다. 



"북한군 전차를 저지하라! 공유, 철원 토우중대 복무"


네, 맞습니다. 공유는 2008년 1월 입대를 한 후 철원 토우중대로 자대배치를 받게 됩니다. 

이후 8개월 동안 자신의 군 생활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다는 철원 토우중대에서 훈련을 합니다. 



'토우중대가 뭐지?'


TOW란 대전차 미사일을 말합니다. 대전차 중대를 말하는데 부대의 기동력을 높이기 위해서 부대 내의 모든 차량이 토우 미사일이 장착된 지프 차량으로 구성된 사단 직할대로 중대급 편성이며 독립중대로 운영하는 중대를 말합니다. 


▲공유의 '공유가 기다리는 20시' 국방부 라디오 방송

8개월의 철원 토우중대 복무 후, 홍보지원대원으로 DJ로 활동할 당시의 사진입니다.


전역 당시 인터뷰에서 공유는 군대 생활에 대해서 가장 잊지 못할 기억은 "처음 8개월 동안 철원에서 복무했던 시기" 라고 했는데 그 추운 1월의 철원에서 문이 모두 개방된 지프 차량을 타고 속도를 내면서 전술 훈련을 했다면... 상상이 가네요.



이렇게 그가 군 생활의 절반에 가까운 시간을 강원도 철원에서 군 복무를 했었다는 사실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였습니다. 



철원에서 복무할 당시 그의 특별한 군 복무 경력은 전역 이후, 그가 연기 생활을 다시 시작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후 용의자, 부산행, 밀정 등에서 굵직한 연기를 보여줬고 다시 드라마로 복귀 한 후, 이제 다시 도깨비 공유로 전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배우임을 다시 한 번 국민들 가슴에 각인시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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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대를 배치받고 본격적인 군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훈련을 받는 시간 외에 의외로 자뚜리 시간들이 많이 남습니다. 

요즘 군대에서는 남는 시간들을 이용해서 군인들의 취미생활을 독려해주는 분위기라고 합니다. 하지만 계급에 맞게 눈치껏 하는 것이 군 생활을 편하게 하는 좋은 요령인 거 같습니다. 



그럼 지금 현역들이 추천하는 군대 계급별 취미생활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병 추천 취미생활


위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이병 때는 정말 눈치가 빨라야 합니다. 이병 때 제대로 해야지 군 생활 내내 편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개인 취미생활을 독력하는 분위기라도 너무 개인적이거나 튀는 취미는 이병 때는 삼가셔야 합니다. 

추천 취미생활로는 책 읽기, ②구석에서 조용히 편지쓰기, ③선임들 tv 시청할 때 살짝살짝 보기, ④선임들 특징 파악해두기



자대 배치를 받으면 여자친구가 많이 그립고 보고 싶은데 이런 외로움 마음을 편지로 대신한다면 좋은 연애편지가 탄생하게 됩니다. 

전역할 때가 되면 어느새 시인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편지쓰기는 이등병에게 가장 추천하는 취미생활입니다.




2. 일병 추천 취미생활


이제 내무반 분위기는 거의 파악했을 시기입니다. 

분위기를 어느 정도 적응했다고 선임들에게 섣불리 행동했다가는 헬게이트가 다시 열릴 수 있으니 조심해야할 시기입니다.

일병은 내무반의 꽃! 일병이 얼마나 이등병들을 잘 다스리고 훈육하느냐에 따라 선임들이 편해집니다. 

빠릿빠릿한 일병은 어느 부대에서나 선임들에게 사랑을 받습니다. 



이제 선임들이 ①tv 시청할 때 당당하게 볼 수 있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운동으로 선임들과 더욱 찐한 전우애를 쌓는 시기로 ②전투축구, ③족구, ④탁구 등 다양한 운동을 함께 하면서 그들의 신임을 얻어야 합니다.




3. 상병 추천 취미생활


상병쯤 되면 이제 군 생활이 슬슬 편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진짜 군번이 꼬인 경우는 제대하는 그 순간까지 편한 생활은 힘듭니다. 


 

tv도 병장 옆에서 얼마든지 편한 자세로 볼 수 있습니다. 저처럼 군 생활하면서 특별하게 취미를 갖지 못했다면 다양한 tv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것도 좋은 취미생활이 됩니다. 가요 프로그램을 섭렵하고 걸그룹에 대해서도 공부하는 시기입니다. 


추천 취미생활로는 ①tv 시청, ②개인적인 취미생활이 가능, ③헬스, ④걸그룹 이름 외우기, ⑤걸그룹 안무 외우기




4. 병장 추천 취미생활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이제 보다 적극적으로 일반인처럼 취미생활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곧 민간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노래를 미리 알아둬야지 말년 휴가 때 미팅녀와 노래방에서 군가를 부를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좋아하는 FPS 게임도 레벨을 팍팍 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수시로 민간인들을 시뮬레이션 해야 합니다. 

이제 곧 민간인이 되기 때문에 사회인으로 생활해야 할 준비를 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책이나 자격증, ④사회 생활을 하면서 도움이 될 만한 것들, ⑤제대후 구체적인 미래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군 생활을 돌이켜 보면 정말 다양한 에피소드가 많이 있습니다. 

남자들끼리 모여서 힘든 훈련으로 하루 일과 대부분을 보낼 때도 많지만, 시간이 남을 때는 정말 온갖 다양한 일들을 하게 됩니다. 

특이한 취미생활을 만들어서 제대 후에도 열심히 하는 친구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어차피 2년이라는 시간 동안 군 복무를 해야 한다면 자신만의 멋진 취미생활을 만들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군 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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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유격훈련, 이정도는 해야지 무적 해병대!


제대를 했어도 군대 훈련을 생각하면 제일 많이 생각나는 훈련은 아마 유격훈련일 것입니다.

특히, 해병대 유격훈련은 일반 육군의 유격훈련보다 프로그램도 많고 힘들기로 유명합니다. 오늘 소개해드리는 사진은 대한민국 해병대가 왜 무적 해병대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바로 대한민국 해병대 유격훈련 현장을 가보겠습니다. 



<훈련일정>

PT체조, 장애물 훈련, 두 줄/세 줄 도하, 외줄 도하, 산악구보, 암벽등반, 매듭법 등으로 구성됩니다.



유격 장갑입니다. 벌써부터 손바닥이 아려오는 거 같습니다. 

PT는 교관의 재량에 따라 회수를 적당히 하는 분도 있고 처음부터 아주 힘들게 훈련시키는 교관도 있습니다. 

PT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선착순이죠!! 한 명이라도 틀리면 선착순! 선착순! 정신 차릴 때까지 다시! 선착순

('훈련보다 선착순이 더 힘드네'라는 생각이 들때쯤...오리걸음 선착순은 거의 기절입니다)



절벽에 매달리면 처음 시도할 때는 무릎도 펴지지 않고 손발이 떨리지만 훈련이 거듭될수록 자신감도 생기고 체력도 받쳐주게 됩니다. 

해병대가 되면 이 정도 훈련은 기본으로 할 수 있게 됩니다. 



암벽등반 

슬립, 텐션, 로프 고정! 처음에는 힘으로 하려다 이내 기진맥진할 수 있지만 요령만 알면 다음부터는 쉽게 할 수 있습니다. 

"208번 쉬지 말고 움직여!"



벽암지 유격장 

고소공포증이 있는 해병도 처음에는 머뭇거리다가도 금방 적응하고 씩씩하게 등반을 합니다.

안되면 될때까지!! 그게 해병대니까요!



균형을 잘 잡고 가다가도 빨리 가려고 마음을 성급하게 먹다가는 균형을 쉽게 잃습니다. 

실수로 하늘을 보게면 원위치 시키기 정말 힘듭니다. 한쪽 발을 아래로 내리고 줄은 가슴에서 사선으로 해야지 중심이 잘 잡힙니다.



앉아 레펠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오른손의 역할이죠!! 오른손 위치는 엉덩이!!

처음 훈련을 받을 때는 자세를 잡는 것도 내 맘처럼 되지 않지만 숙달이 되면 반쯤 내려와서 조교처럼 도약을 하는데 여기서 더 자신감이 붙으면 꼭대기에서부터 도약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수직 레펠

밑에서 아기 마린보이들이 집중해서 보고 있습니다. 솔직히 아래에서 볼 때는 은근히 쉬워 보입니다. 

하지만 위로 올라가서 직접 줄을 잡으면 1초도 되지 않아서 생각이 달라집니다.



뒤에 보이는 대원은 머리를 많이 다친 거 같은데도 훈련을 포기하지 않고 악으로 깡으로 집중하고 있습니다. 

바로 저런 모습이 해병대의 모습이죠.



세 줄 도하 

비교적 아주 쉬운 훈련입니다. 훈련장 아래로 도로가 보이는데 포항 유격장의 모습입니다. 

가끔 차를 멈추고 내려서 구경하는 시민들도 있습니다. 



해병대 유격장의 꽃! 헬기레펠 교장의 모습입니다. 

난이도가 굉장히 높은 훈련으로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이제 죽는구나'라는 말이 자동으로 나옵니다. 



헬기 레펠

43M쯤 되는데 해병대라면 이 정도는 다 할 수 있습니다. 해병대 자부심이라는 게 왜 생겨나는지 알게 되는 훈련으로 땅에 발을 딛는 순간 '해냈다'라는 자부심이 가슴에서 치고 올라오는 걸 느끼게 됩니다. 



하강

맡은 편 절벽으로 이동하는 훈련인데 절벽의 높이는 55M에 이릅니다. 

떨어진다면.. 하지만 아직 저 훈련 중에 떨어진 사람은 업습니다. 



백령도 해병대의 외줄 타기

백령도 유격장은 섬과 섬사이를 로프로 걸어놓고 훈련을 하는데 아시아에서는 최고 긴 장거리 외줄입니다.




중간쯤 오면 로프가 V자를 만들면서 균형을 잡기 힘들어지고 체력적인 소모도 많이 생깁니다. 

여기서 전진을 못하고 쳐지게 되면 바로 조교가 줄을 흔듭니다. 그러면 100% 뒤집어지는데 '통닭'이 되면 몇 배로 체력 소모가 되기 때문에 최대한 중심을 잡고 통과해야 합니다.  



이렇게 모든 훈련이 끝나고 나면 더 멋지고 강인한 해병대로 거듭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해병대의 자부심은 그저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걸 몸소 체험할 수 있는 해병대 유격훈련의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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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들의 군통령! 걸그룹 시대별 변천사


군대 복무 시절을 생각하면 많은 것들이 생각납니다. 그중에서도 결코 빠질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걸그룹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힘든 훈련과 일상 속에서 위문공연, 내무반 가요 프로그램 시청은 힘든 군 생활의 고단함을 한번에 씻어줬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아닐까요?



오늘은 힘든 훈련 속에서 피어나는 전우애 이상으로 더 끈끈했던 

그 시절 우리들의 군통령으로 불렸던 걸그룹을 시대별로 소개합니다!



1. 1990년대 군통령 

핑클, SES



1990년대는 10대에서 20대 취향으로 음악의 흐름이 급변하면서 가요계가 크게 발전하는 시기였습니다.

당연히 이 시대의 군통령 걸그룹은 핑클과 SES였습니다. 

당시 군 내무반에 신병이 들어오면 선임이 제일 먼저 물어보는 것이 핑클이 좋냐? SES가 좋냐? 였는데 잘못 대답하면 괜히 얼차려를 받았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도 이런 경험해보신 분이 많을 줄 압니다^^



2. 2000~2005년대 군통령 

베이비복스, 쥬얼리



2000년대 가장 핫했던 걸그룹으로는 베이비복스와 샤크라가 있었습니다. 

이때도 선임들이 신병이 오면 하던 질문이 뭐였냐면, "간미연, 심은진, 김이지 중에서 누가 가장 예쁘냐?"였습니다. 

물론 모두 인기가 많았지만 당시 간미연 분이 가장 군인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던 걸로 기억됩니다. 



3. 2005~2010년대 

소녀시대, 원더걸스



2000년대 초반은 걸그룹의 풍년 시대로 접어들었던 시기입니다. 많은 걸그룹들이 데뷔했는데, 소녀시대와 원더걸스가 거의 독식하고 있던 터라 두 걸그룹이 당시 대한민국 군인들의 군통령으로 군림하게 됩니다. 


특히 소녀시대가 내무반 TV에 나오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GEE! GEE! GEE!

선임과 후임 할 거 없이 모두 함께 떼창을 했던 그 시절.

이미 소녀시대는 군인들의 군통령을 넘어서 "신앙"이었습니다. 



4. 2010~2015년대 군통령 

씨스타, 걸스데이, 에이핑크, 미스에이


2000년대 초반에 소녀시대와 원더걸스가 걸그룹의 신화를 만들면서 이 시기에는 수많은 걸그룹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걸그룹은 역시 씨스타죠.

그 시절을 추억하는 많은 분들이 이렇게 생각할 거 같습니다.

Touch my body~ 씨스타! 



5. 현재 군통령 

트와이스, 여자친구, 마마무, AOA


최근에는 이름을 다 외우기 힘들 정도로 많은 걸그룹이 있습니다. 요즘은 추세가 특정 걸그룹이 인기를 독식하기보다는 각 걸그룹의 특색에 따라 소군통령으로 나누어지는 거 같습니다. 


AOA가 나와도 악~ 트와이스가 나와도 악~ 여자친구가 나와도 악~


고된 훈련으로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힘들었어도, 

항상 힘이 되어줬던 그 시절 우리들의 군통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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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S급 보병부대! 지금도 최강이라 불리는 이유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약속이나 한 듯이 자신이 군 생활했던 곳이 가장 힘든 부대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세대를 거쳐서 우리들 아버님 시절로 올라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라면 다 같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군생활 했던 부대는 진짜 힘들었어!'라고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말하니까요.



그럼 아주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과거 자대 배치를 앞둔 훈련병들과 해당 부대를 전역한 분들을 대상으로 대한민국 S급 메이커 부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대한민국 S급 보병부대! 최강의 부대를 소개합니다."


1. 제2사단 노도부대

2. 제8사단 오뚜기부대

3. 제11사단 화랑부대

4. 제27사단 이기자부대



육군 메이커 부대에 대해서 대한민국 모든 육군 부대를 하나의 기준을 놓고 '힘들다', '세다'라는 단어로 순위를 정하는 것은 어쩌면 모순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육군에서는 오래전부터 그 부대가 가진 역사와 부대원들의 강인한 전투력을 기준으로 메이커 부대라는 별칭을 사용해 왔습니다. 



1. 제2사단 노도부대


엄청난 추위와 더위, 열악한 시설과 환경, 육군 최고의 훈련량으로 일반 육군 중에 2사단 노도부대와 비교할 부대는 없다고 할 정도로 생각만 해도 입에 단내가 나는 부대입니다. 



강원도 양구 쪽에 위치한 주둔, 수색, 경계 임무를 펴는 사단으로 1947년 12월 1일 대전에서 2여단으로 창설되었으며 1949년 제2보병사단으로 증편되었습니다. 6.25 전쟁 중 '화령장지구전투'에서 북한군 15사단을 기습해 괴멸시키는 혁혁한 공을 세운 부대로 유명합니다. 



1986년 울진 삼척과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 때에도 큰 공을 세워 중동부 전선 최정예 산악부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노도부대의 정신은 '백절불굴 불퇴전'이라 하여 '백번이 꺾여도 쓰러지지 않고 전쟁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라는 정신을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훈련하는 부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2. 제8사단 오뚜기부대


경기도 포천에 위치한 군 전투력 시범부대로 훈련량이 많고 그 유명한 중부전선 철책을 담당했던 대한민국 최정예 부대입니다. 

지금은 기계화 사단으로 전환되면서 예전과 같지 않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한때 가장 행군을 많이 하는 부대로 알려져 있었으며, 달에서 보면 만리장성과 오뚜기 부대가 행군하는 모습이 보인다는 말이 있을 만큼 끈기와 인내로 뭉친 강성 부대입니다.



출신 연예인으로는 이휘재, 차인표, 강타, 윤진영 등이 있었습니다. 

전쟁 시 가장 선두에서 싸우게 되는 주력부대로 엄청난 훈련량을 자랑하며 1년에 한 번은 100km 행군이 있습니다. 


3. 제11사단 화랑부대


강원도 홍천에 주둔한 부대입니다. 오뚜기 부대처럼 현재는 기계화 사단으로 개편이 되었습니다. 

일명 젓가락 부대로 알려져 있으며 1야전 사령부 직할부대로 이곳도 행군으로 유명한 부대로 제대할 때까지 지구를 3바퀴 돈다고 할 정도로 엄청나게 걷는 부대로 전역 후에는 절대 걸어 다니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출신 연예인으로는 김국진, 김대희, 정찬우, 임하룡, 최병서 등이 복무했습니다. 

김국진 씨 체형은 작아도 강단 있어 보였던 이유가 화랑부대 출신입니다.



4. 제27사단 이기자부대


강원도 화천에 주둔하고 있으며 휴전선 동부전선을 책임지고 있는 사단입니다. 

최근에 '진짜 사나이' 출연으로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부대입니다. 



이미 사병들 사이에서는 엄청난 훈련량과 강도로 유명한 부대이며,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소탕작전에 참여하여 육군 최정예 부대로 전투력을 과시했습니다. 부대원들이 갖는 자부심이 정말 대단한 부대로 알려졌습니다.



출신 연예인으로는 유승호, 김태우 등이 있습니다. 

특히 무박 4일 극기훈련은 20km, 40km 산악행군과 특공무술 등 교육훈련은 이기자부대 수색대대 내에서도 최정예 부대원만 선발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마지막으로, 전역 후 몇 년, 몇 십 년이 흘렀어도 남자들이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자신의 부대가 최강이라고 말하는 것은 군인으로 있는 동안 힘든 훈련과 시간들을 함께 하면서 가졌던 '자부심'이라고 생각됩니다. 

지금도 훈련으로 자신과 싸우고 있을 현역 군인 여러분! 파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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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잡는 해병대! 연예계 톱스타가 많은 이유


대한민국 남자라면 절대 피할 수 없는 1가지 통과의례가 있습니다. 

때가 되면 찾아오는 입대 영장과 함께 군 복무의 의무가 주어집니다. 이는 피할 수 없는 대한민국 남자들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20대 초반의 혈기 왕성한 젊은 청춘들도 입대가 망설여지는 해병대를 연예인들이 선택하는 이유는 뭘까요?



"귀신 잡는 해병대!"

연예인들이 막강 해병대를 선택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1. 남자라면 역시 해병대

2. 설마 이것도 마케팅?

3. 대한민국 남자로서 진정한 나를 찾는다



예전에는 해병대 출신 연예인에 대해서 대중들의 관심이 그렇게 높지 않았습니다. 

기수가 빠른 남진, 임채무 조상구 이분들은 실제로 뉴스나 기사를 통해서 '아! 해병대 전역하셨구나!' 하고 알 수 있을 정도였죠.

하지만 세대가 바뀌면서 대중들이 해병대에 갖는 관심이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그 이유는 인기 스타가 일반 부대보다 힘든 해병대에 입대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1. 남자라면 역시 해병대 


연예인도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당연히 군 복무의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가끔 병역비리와 관련된 기사를 보면 현재 군 복무를 충실하게 이행하시는 분들과 군 입대를 앞둔 분들이 얼마나 상실감이 크실까 걱정이 됩니다. 

남자라면 아래처럼 수단과 방법을 이용해서 피하지 말고 꼭 입대하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오늘 소개해드리는 분들은 죽을 때까지 '영원한 해병'으로 남을 것을 선택한 남자들입니다.

연예인들 사이에서는 귀신 잡는 해병대는 인기도 잡는다는 설이 있는데 아마 이분들을 두고 하는 말인 거 같습니다.


현빈, 정석원, 이정, 오종혁, 윤시윤.. 등 영원한 해병대이길 선택한 스타!

이분들의 해병대 기수가 어떻게 되는지 한 번 정리해봤습니다.



현빈(김태평) 1137기

자체 발광 현빈!! 이분이 해병대에 입대를 하면서 해병대 입대 경쟁률이 팎! 올랐죠




정석원 (995기)

해병대 중에서도 엘리트만 갈 수 있다는 해병 특수수색대입니다. 그린 베레모가 특징입니다.



윤시윤 (1184기)

약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해병대 예비역입니다. 예능 1박 2일에서 울릉도 학바위 6m 지점 다이빙을 망설임 없이 하는 모습을 보고 '역시 해병대는 다르구나' 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오종혁 (1140기)

가수 클릭비의 오종혁 예비역입니다. 이 분도 해병 특수수색대입니다.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자신도 모르게 조교에게 욕을 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정 (1080기)

의외로 눈물이 많았던 해병 1080기  



그리고 스타 한 분더 모셨습니다.

진짜사나이 송곳 소대장이신 원동현 상사입니다. (칼각의 대명사이자 세상에서 가장 편하게 앉는 법을 알려주신 분)



2. 설마 이것도 마케팅? 


일부에서는 연예인들의 해병대 입대를 두고 일종의 마케팅 차원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2011년 3울 7일 해병대 입대를 했던 배우 현빈은 당시 대중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고 한때 '현빈 효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젊은이들이 해병대에 입대를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연예인들의 해병대 입대가 마케팅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는 백퍼센트 맞다? 아니다? 정확히 딱 잘라서 말하기는 힘들 거 같습니다. 

어쩌면 해병대 이전에 연예인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중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가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3. 대한민국 남자로서 진정한 나를 찾는다


연예인도 처음에는 일반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인기를 얻고 스타가 되면서 그들은 평범한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아무리 평범하게 살아가려 해도 그들은 연예인으로서 대중과 함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해병대 입대는 연예인으로서 예전의 내가 아닌 홀로 선 나를 찾기 위한 출구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예인으로 살았던 나를 잊고 21개월 동안 철저히 대한민국의 해병대원으로만 살아가려는 그들의 높은 의지입니다.



끝으로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


스스로 고난과 역경을 선택한 그들이 귀신 잡는 해병으로, 또 전역 이후에는 인기 잡는 연예인으로 더욱 성숙한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듯이 지금 해병대에 입대를 앞둔 예비 무적 해병대 여러분들도 투철한 해병대 정신으로 다시 태어나 해병대만이 느낄 수 있는 자부심을 잡길 염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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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부대에는 없는 대한민국 해병대의 자부심 TOP 5


대한민국 해병대는 1949년에 창설되었는데 올해로 68주년을 맞이합니다. 해병대가 창설될 당시 우리나라는 지리적 위치상 상륙작전과 수륙양면작전을 확실하게 수행할 수 이는 막강한 엘리트 부대가 필요했습니다. 그 당시에도 극도의 인내력과 전투력을 요구하는 훈련을 통과해야만 해병대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특수한 목적으로 생겨난 해병대는 각종 전투와 6.25, 월남전 등 현대 전쟁터에서 경험한 실전을 바탕으로 현재는 최고의 강성부대로 성장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대한민국 해병대가 되었을 때 그들이 가지는 자부심은 정말 대단합니다. 



다른 일선 부대에는 없는 그들이 최고의 부대라고 느끼는 자부심은 어디에서 생기는지 지금부터 알아보겠습니다.

다른 부대에는 없는 대한민국 해병대의 자부심은 이렇습니다.


1. 팔각모와 붉은 명찰.

2. 귀신 잡는 해병대.

3. 아무나 해병대가 될 수 없다.

4. 한 번 해병대는 영원한 해병대다.

5. 한국 전쟁 당시 중앙청 태극기를 게양함.



1. 팔각모와 붉은 명찰


해병대의 상징인 팔각모는 일반 부대의 전투모(게리슨 모)와는 다른 형태인 팔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팔각의 뜻국가에 충성하라, 뜻 없이 죽이지 마라, 부모에 효도하라, 욕심을 버려라, 벗에게 믿음으로 대하라, 유흥을 삼가라, 전투에 후퇴하지 말라, 허식을 삼가라의 팔각의 의미와 '지구 어디든지 가서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는 해병대'라는 의미의 팔극의 의미도 있습니다. 

팔각모를 착용한 해병대의 모습이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는 이유를 이제 알 거 같습니다. 



해병대만의 붉은 명찰은 책임과 의무를 다하라는 명령인 동시에 무적 해병대를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붉은색은 피와 정렬을 나타내며 젊음을 조국에 바친 해병대의 전통을 나타냅니다. 

또한 황색은 땀과 인내를 상징하며 신성하고 예의 있으며 활기차고 땀과 인내의 결정체임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2. 귀신 잡는 해병대 


해병대 창설 후 1년 뒤, 6.25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후 경남 통영이 북한군에 점령되는데,,

1950년 8월 17일 해병대는 한국 최초의 상륙공격작전을 펼치고 이틀 만에 북한군에게서 통영을 탈환하는데 성공합니다.



당시 뉴욕 종군기자인 마거릿 하긴스는 통영상륙작전을 취재했는데 우리나라 해병대를 '귀신 잡는 해병대'라고 소개하면서 한국 해병대의 우수함을 나타내는 상징처럼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3. 아무나 해병대가 될 수 없다.


해병대 입대 경쟁률은 한때 10:1까지 치열했던 때가 있을 정도로 아무나 입대할 수 없는 곳입니다. 

최고의 군인이 되기 위해서는 최강의 정신력과 육체로 무장되어야 하는데 기초체력은 기본적으로 갖고 있어야지 힘든 6주 훈련을 견뎌내고 정예 해병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병대로 다시 태어나면 아무나 해병대가 될 수 없다는 자부심과 함께 악으로 깡으로 라는 자부심으로 가득찬 해병대원이 될 것입니다. 



4. 한 번 해병대는 영원한 해병대다.


해병대는 일반 부대보다 전우애가 끈끈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해병대 전우회'만 봐도 그들의 유대관계가 얼마나 끈끈한지 알 수 있죠.

훈련소 입간판에 '해병대의 미래는 이곳에서 시작된다'라고 적혀있는데 모든 훈련을 마치고 신병훈련소에서 붉은 명찰을 가슴에 달 때 더욱 끈끈한 전우애를 알게 되고 투철한 정신력과 강인한 체력으로 단련된 자신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과정들을 모두 거쳐야만

'한 번 해병대는 영원한 해병대다'라는 의미를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한국 전쟁 당시 중앙청 태극기를 게양함.


한국전쟁에서 9.27 서울 수복 때, 서울 중앙청에 태극기를 다시 게양한 부대가 바로 해병대입니다. 

태극기를 게양했다는 것은 전장에서 가장 선봉에 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후 중앙청 태극기를 게양하는 모습은 대한민국 막강 해병대를 상징하는 하나의 자부심이 되었습니다.



지옥 같았던 모든 훈련을 이겨내고,

처음으로 가슴에 붉은 이름표가 달릴 때, 그 가슴 벅찬 느낌은 

진정한 대한민국 해병대가 아니고서는 절대 누릴 수 없는 자부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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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4.3사건의 배경과 원인


오늘은 제주도 4.3사건에 대해서 글을 적어볼까 합니다 

1948년 4월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으로 무력충동과 진압과정에서 있었던 제주도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입니다. 

이 당시에 희생된 주민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너무나 많은 무고한 주민들도 있었습니다. 

이념의 대립이 가져온 무서운 사건으로 항상 힘 없는 국민들이 희생을 당했던 역사입니다. 



제주도 4.3사건의 발단


독립전까지 제주도는 일본군의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그에 따른 일제의 부역자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군은 철수를 하고 육지로 나갔던 주민 6만 여명이 다시 제주도로 들어오면서 

제주도는 극심한 취업난과 갑작스런 인구의 증가로 식량이 부족하고 전염병이 창궐하며 당시 식량정책 또한 

실패로 돌아가면서 민심은 갈수록 미군정에 반감을 가지게 됩니다. 



주민들은 독립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미군이 들어와서 치안을 담당할 경찰을 해방 전 일제시대 때 일본에 부역했던 

경찰들을 다시 고용했고 이들 중에는 이러한 지위를 이용하여 갖가지 부정과 부패를 저질렀고 주민들은 갈수록 불만이 높아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제주도 4.3사건이 시작되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3.1절 발포사건은 당시 좌파였던 민주주의민족전선이 기념 집회를 열었는데 가두행진을 할 즈음 구경하던 어린아이가 경찰이 탄 말에 

치여 3.1절 발포사건의 발단이 됩니다. 



경찰이 탄 말이 아이를 치고 그냥 가려고 하자 이를 본 군중들은 경찰에게 돌을 던지면 쫓아갔는데....


이 시기에는 주민들이 경찰에 대한 불만이 상당히 높았던 시기입니다. 쫓아오던 주민들을 본 경찰들은 주민들을 

경찰서를 습격하는 단체로 오인하여 비무장한 군중들에게 총을 발포하여 6명 사망, 6명 중상을 입습니다. 


이 사태를 미군정은 수습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시위대의 경찰서 습격사건"으로 매도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 간부와

학생들을 강제 연행하는데 이에 시민들은 경찰에 대한 반감이 더욱 높아졌고 .. 이를 놓치지 않은 남로당은 주민들을 

부추겨 반경활동을 더욱 거세게 진행합니다. 


1948년 4월 3일 

350여 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12개 경찰서를 습격하는 사건을 계기로 6개월 동안 이와 비슷한 유혈사태가 계속되었고,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의 문제를 정부에 대한 반정부 시위로 규정하고 1948년 11월 21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게 됩니다. 


이렇게 강경진압작전이 계속되자 진압대에 의한 주민 사망자와 무장대에 의한 주민의 사망자 수가 계속해서 늘어갔으며

그 사망자 수는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였습니다. 

진압대에 의한 주민은 14000여 명, 무장대에 의한 주민 사망자 수는 1100여 명에 이릅니다. 

사망자 중에는 남녀노소, 임산부까지 할 거 없이 잔인하게 살해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하니... 당시 제주도는 그야말로 지옥이라고 할 수 있었겠습니다.



※ 제주도 4.3사건을 요약해보면..

"서로 다른 이념적 갈등이 극대화 되어 일어난 사건"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해방 후, 미군정의 친일파 등용과 일제시대 일제의 부역자 경찰출신들을 미군정 경찰로 등용합니다. 

밀수품 단속을 빙자한 모리행위, 6만 여명에 이르는 귀한인구의 실직, 경제난, 생필품 부족, 전염병 등 

군정 경찰, 서북 청년단체와 극우 단체들의 횡포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 등이 복합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봅니다. 


요약,

1. 1948년 3울 1일, 경찰은 5.10선거를 반대하는 제주도민들에게 총을 쏜다.

2. 미군정은 이 발포사건을 정당방위로 주장하며 제주도민들을 폭도로 지정.

3. 이후 1948년 4월 3일, 350여 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12개 경찰서를 습격하고 6개월간 유혈사태가이어짐.

4. 1948년 11월 21일 이승만 정부의 제주도 계엄령 선포. (반항하면 총살)

5. 계엄령에 반대하던 주민들이 산으로 들어가 무장대를 조직하여 대항함.


-무장대의 주장-

경찰과 반공청년단체의 탄압에 대한 저항이다. 

남한 단독선거 반대와 조국통일독립을 주장.






419혁명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


최근들어 역사를 돌이켜 보면 저도 모르게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개인 한 사람의 욕심과 부역자들에 의해서 너무나 많은 무고한 국민들이 희생을 강요당하는구나..오늘은 1960년 4월19일에 있었던 419혁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6.25전쟁으로 인해 극도로 나라가 불안정할 때 당시 자유당 이승만 총재는 반공을 내세워 자신의 독재정치를 강화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곧 수많은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게 되는데 이때부터 이미 정치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간첩"이라고 내세우면 뭐든지 되는 시대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2016년 요즘 정치도 마찬가지처럼 보입니다. 간첩조작..)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 앞서 각종 부정과 부패로 대한민국 국민의 대부분의 민심을 잃었던 자유당은 이승만과 이기붕을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서 부정선거를 계획하게 됩니다. 이 부정선거로 인해서 전국에서 많은 국민들이 각 시도에서 부정선거를 비판하는 시위를 하게 됩니다. 



4할 사전 투표와 선거박스 바꿔치기, 선거 참관인을 축출시키는 등.. 부정이 극에 달합니다 

이에 선거 당일 마산의 민주당 간부들은 자유당의 4할 사전 투표는 부정이라며 항의를 하며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부통령의 당선의 무효를 주장하게 됩니다. 


이에 마산 시민들까지 이 시위에 합세하면서 당시 선거 개표장 부근에서 다시 시위를 이어가자 시위가 한참 격해질 무렵, 갑자기 일어난 정전, 그리고 정막을 깨는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바로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서 경찰이 총을 발포하기 시작해서 시위에 참가했던 일반시민 8명이 경찰에 의해서 무참히 살해되고 100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으며 200여 시민들이 경찰에 의해서 연행되면서 시위는 마무리됩니다.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 합심해야 할 때, 개인의 욕심에 눈이 먼 지도자가 이렇게 국민들의 가슴과 나라의 역사에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이 시위가 잠잠해지고 3일이 지난 뒤 신문 지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립니다.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기붕 당선!!




당시에 자유당의 부정부패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이었는지 이 대목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지금 세대에서는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로 어이가 없는 사건입니다. 



이렇게 이승만과 이기붕이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된 후,

4울 11일 마산의 어느 앞바다에서는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바다에 던져진 시위 학생인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이 사건은 이후 경찰에 의한 소행으로 밝혀지자 2만여 명의 신민들은 경ㅊ라서와 시청에 난입하여 격력하게 시위를 하는데

이를 계기로 경찰은 다시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서 무차별 발포!!




이틀이 지나 거리로 마산의 모든 남녀고등학생들이 정권 타도 시위에 나오자 이승만 정부는 급히 특별담화문을 발표하게 됩니다. 


"이 난동에는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도 있어서 지금 조사 중이다."


(최근까지도 이 멘트는 많이 들어본 듯 합니다....그렇게 생각하시면 "공감"에 한표를)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이기붕의 부정선거에 대한 시위운동은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한 운동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하며

고려대학교에서는 4.18 선언문을 발표로 기성세대의 자성과 마산사건의 책임자를 즉시 처단하라고 외쳤고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회 또한 4.19 선언을 발표하며 1960년 4월 19일에 이르러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한 운동은 가장 절정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후 시위대 10만 명 가량이 세종로와 태평로에 모여 경무대로 행진을 하면서 격렬해지자, 경찰은 다시 한 번 시위대를 향해서 총격을 가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 시위에 모였던 시위대와 전국에서 일어났던 시위에서 200여 명 가까운 무고한 시민들이 소중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후에 이승만은 3.15 부정선거를 인정했으며 자신의 부정에 대해서 일부 대책들을 제시했지만 지식층이었던 전국 대학에서 모인 교수들 285명은 부패의 온상인 이승만 정권은 물러나야 한다고 시국선언을 하기에 이르고 희생된 학생들의 피를 보상하라며 다시 한 번 전국적으로 이승만 정권 타도 시위가 이어집니다. 

(최근의 사태와 비슷한 느낌입니다..)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대규모 시위로 번지자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하야 성명을 라디오를 통해서 발표합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성명의 일부입니다> - 1960녀 4월 26일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할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이로써 이승만 대통령은 즉시 하야하게 되고 만장일치로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게 됩니다.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통과하고 대한민국은 최초의 지방선거를 실시하는 등 민주주의로 발전하는 듯 했으나


얼마되지 않은 1961년 5울 16일,, 박정희 대통령이 주축이 되어 군사 정변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것이 516쿠테타...



<구테타에 성공한 직후 박정희 대통령과 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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