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치열한 '초음속 대함미사일' 개발 경쟁 중입니다. 한반도 주변국인 북한, 러시아, 중국, 일본 등은 벌써부터 초음속과 극초음속 대함미사일의 개발에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으며, 북한도 이미 초음속 대함미사일의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대한민국 해군 역시 2000년대부터 연구를 시작하여 2015년에 개발을 완료할 계획이었지만, 핵심기술의 확보와 소형화의 요구 끝에 2017년, 최근 개발이 완료단계에 있습니다. 




한국형 초음속 대함미사일은 주변국의 항공모함과 최신형 구축함, 이지스함에 대응하기 위해 개발 초부터 최고 극비로 분류되어 왔지만, 중국의 항공모함 도입으로 인해 위기를 느낀 한국은 2011년 8월 16일, 국방과학연구소에서 한국에서도 초음속 대함미사일이 개발되고 있다는 것을 공식화 했습니다.



현재 한국 해군이 운용하고 있는 대함미사일은 '해성'과 '하푼 대함미사일'이 있는데 이들 미사일은 마하 이하의 속도로 비행하기 때문에 적 함정의 단거리 대공미사일 및 기관포에 쉽게 요격될 수 있는 단점이 있는 반면, 초음속 대함미사일은 마하 3의 빠른 속도와 함께 수면 10m 내외로 낮게 날아가기 때문에 요격하기가 힘듭니다.


최근 개발된 한국형 초음속 대함미사일의 개발 배경을 알아보기 위해 먼저 러시아의 세계 4대 초음속 대함미사일인 'P-500 바잘트'와 'P-800 야혼트'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구 소련이 해체되었을 당시, 소련의 군수회사들은 외국과 군사기술 이전협약 등을 자주 맺었는데, 이 때문에 무기와 기술이 주변국으로 많이 흘러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 한국 역시 러시아의 무기 기술들을 습득할 수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들을 나열해 보면, 전차 장갑과 자동장전 장치와 중거리 지대공미사일, 휴대용 대공미사일, 중거리 대전차 미사일, 순항미사일 제트엔진 기술 등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초음속 대함미사일'에 대한 기술입니다. 한국은 2005년부터 초음속 대함미사일의 개발을 시작하여 2015년 완료를 목표로 했었는데, 그 개발의 모델이 바로! 러시아의 세계 4대 초음속 대함미사일인 'P-800 야혼트'입니다.


러시아의 대함미사일 'P-800 야혼트'


▲P-800 야혼트


러시아에서는 P-800 오닉스로 불리며, 수출명은 전부 '야혼트'라고 불립니다.(P-800 야혼트는 P-500 바잘트의 개량형입니다.) 간단히 제원을 살펴보면, 전장 9m, 전폭 0.7m, 무게 3톤, 속도 마하2.5, 사거리 300km, 탄두 250kg 고폭탄두를 사용하며, 고체로켓 부스터와 램제트 추진을 병용하며, 상당한 크기와 중량, 속도를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야혼트의 크기가 거대한 이유는 미국의 해군 전력에 밀렸던 구 소련이 자신들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대함미사일 한방으로 미국의 구축함이나 항모를 파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죠. 거대한 크기와 탄두, 무게, 빠른 속도는 항공모함도 격침이 가능한 수준이었습니다. 


러시아의 대함미사일 'P-500 바잘트'



P-800 야혼트의 전신인 P-500 바잘트를 탑재한 '항공모함 킬러'라는 별명을 가진 러시아의 슬라브급 순양함은 미국 해군이 러시아의 키로프급과 함께 가장 경계하는 최강의 순양함입니다. 




위 영상은 1975년 운용되었던 'P-500 발잘트'에 타격되는 2만 톤 급 함선의 모습입니다. 무게 4.5~4.6톤, 탄두 중량 1톤 길이 11.7m, 사거리 500km, 속력 마하 2.5로 한마디로 거대함! 그 자체입니다. 4.5톤의 무게와 탄두 중량 1톤과 마하 2.5의 속도는 폭발 없이 단지 중량과 속력만으로도 웬만한 함선은 격침시킬 수 있는 제원입니다. 



이런 막강한 파워를 지닌 P-500 바잘트도 단점이 있는데, 너무나 큰 덩치 때문에 플랫폼이 매우 제하적이었고, 비행 중 회피기동이나 추적 유도기능 능력도 떨어졌는데, 이런 단점을 보완해서 개발된 것이 바로 'P-800 야혼트'였습니다. 


P-800 야혼트는 P-500 바잘트 보다 1톤 이상의 무게를 줄였지만 여전히 거대한 3톤의 중량과 바잘트의 단점들을 모두 개선해 마하 2.5의 초음속으로 비행 중에도 복잡한 '경로점 비행'이 가능합니다. 


참고> '경로점 비행'이란 경로를 설정하지 않고, 경로점(Waypoint)을 지정하여 비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3톤의 중량과 마하 3에 이르는 속도에도 좌우 상하 회피하며, 복잡한 패턴으로 비행할 수 있다는 것이죠. 한마디로 적함의 방어체계로 쉽게 격추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이런 기능은 우리 해군이 실전 배치한 해성도 가지고 있는 기능으로 오늘 설명드릴 '한국형 초음속 대함미사일' 역시 이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


서두에 장시간 러시아 초음속 대함미사일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는 이유는 현재 우리가 개발한 한국형 초음속 대함미사일'의 우수성에 대해서 이해를 돕기 위해 꼭 추가되어야 할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대 한국은 러시아의 군수업체를 통해 'P-800 야혼트'의 기술을 도입하기로 하고 야혼트의 제작사와 기술협약과 이전에 대해 계약했습니다. 



한국형 초음속 대함미사일은 2020년 실전배치될 것으로 예상되며, 길이 6.5m(야혼트 9m), 폭 0.5m, 중량 1.5톤, 속도 마하 3, 사정거리 300~500km 정도입니다. 즉, 야혼트에 비해 크기를 줄였지만.. 향상된 속도와 중량그리고 성능을 자랑합니다.

또한, 스텔스 설계 및 ku 밴드 레이더, 가시광선 탐색기 등 다중 모드 탐색기를 이용해 적함의 약점을 찾아 타격이 가능합니다. 


결론은 한국형 초음속 대함미사일은 P-800 야혼트의 단점이었던 큰 덩치와 회피기능의 불안정을 극복했고, 성능이 향상되었으며, 소련과 인도의 합작품인 브라모스 보다 소형화에 성공하였고, 속도 또한 마하 2.5에서 마하 3으로 향상되었습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구입하려고 눈독을 들이고 있는 인도의 브라모스 초음속 대함미사일 역시 러시아와 인도가 합작해서 만든 대함미사일입니다. 인도의 브라모스가 야혼트의 개량판이라면, 한국의 초음속 대함미사일은 러시아의 비행체 기술에 한국의 최신 전자 기술이 합쳐졌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한국형 미니 이지스함 FFX 배치3


여기서 또 주목할 점은, 한국형 초음속 대함미사일의 큰 크기 때문에 새롭게 건조될 세종대왕급 이지스함 배치 2와 FFX 배치 3 등에서 운용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 점입니다. 



그리고 현재 수직발사기 역시 더욱 커진 한국형 초음속 대함미사일의 크기에 맞게 새롭게 개발 중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가장 기대가 되는 부분은 현재 건조 중인 한국의 톱 급 잠수함이자 차후 원자력 잠수함이 될 수도 있는 장보고 3급에 운용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으며, 원래 장보고 3에는 현무 3 순항미사일을 탑재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기존에 발표된 제원보다 현재 건조 중인 장보고 3의 제원은 폭이 2m, 늘어난 길이 8.5m, 폭 9.6m 임을 감안한다면 아마도 폭이 늘어난 이유는 신형 한국형 초음속 대함미사일 발사관을 탑재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잠수함 폭이 9.6m라는 것은 현존하는 디젤잠수함 주에 가장 큰 수치입니다. 



만일 장보고 3급에 사거리 1500km인 현무 3 순항미사일과 현무 2 탄도미사일 그리고 한국형 초음속 대함미사일이 탑재된다면, 해군 전력에 상당한 힘을 실어줄 것으로 기대할 수 있겠습니다. 



현재 건조 중인 장보고 3급에는 6개의 수직발사관이 탑재되는데 이후 2020년에 건조되는 장보고 3급 배치 2에는 총 10개의 수직발사관이 장착된다고 알려졌습니다. 수직발사관이 10개로 늘어난다는 것은 잠수함의 길이 또한 90m 이상이 될 것으로 판단되며, 원자력 잠수함과 맞먹는 크기로 간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원잠으로 간다는 의미로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함정과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한국형 초음속 대함미사일이 완료된다는 점은 이후 공중에서 전투기를 이용해서 발사가 가능한 방식도 예상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마치며, 한국형 초음속 대함미사일의 스펙을 요약해보면, 


1. 한국형 초음속 대한미사일 사업은 러시아를 통해 핵심 기술을 도입해지만 렘제트와 전체 설계와 제조는 국내에서 진행.


2. 러시아는 기술료와 자문료를 받고 한국에 기술이전 했고,

개발은 우리가 했기 때문에 수출시 러시아의 허가가 필요없다.


3. 국산 램제트 엔진을 개발하면서 국내에서 취약했던 초고온 

내열재료 개발과 제조기술이 크게 발전하였다.


4. 국내에 다양한 풍동시설이 설치되어 유도무기 개발 기반

인프라에 큰 도움이 되었다.


5. 한국형 초음속 대함미사일은 초음속 외에도 레이더 탐지를

회피하고자 스텔스 형상설계와 RAM이 적용되었다.


6. 데이터 링크와 네트워크 기반 능력을 갖췄다.

(자세한 사항은 기밀)


7. 마하 2.5에서 마하 3으로 속도가 향상되었다. 


8. ESM 추적모드와 IIR+CCD 카메라로 전파침묵상태에서도

적함의 치명적인 부분을 정확히 찾아 타격이 가능하다.



곧 개발이 완료되는 한국형 초음속 대함미사일이 실전배치가 완료되면 주변국에 비해 다소 약했던 한국 해군 전력에 큰 힘이 되어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리고 현재 국방과학연구소와 한국항공우주원은 초음속 미사일을 넘어 마하 5~7에 이르는 극초음속 미사일에 대한 연구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극초음속 대함미사일은 마하 5이상의 속도로 비행하기 때문에 현존하는 미사일 방어체계로는 요격이 불가능한 꿈의 신무기입니다. 한국 해군 전력 증강을 위해 극초음속 미사일 또한 하루빨리 개발이 완료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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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육군 최강의 부대로 알려진 백골부대는 북한의 도발에 최초로 보복포격을 가한 북한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한민국 육군 부대로 알려졌습니다. 올해로 부대 창설 68주년을 맞는 백골부대는 대한민국 전군 유일의 DMZ 완전작전으로 명성이 높으며, 타 육군 메이커 부대에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패기와 용맹이 대단한 부대입니다. 




대한민국 육군 메이커 부대 중에서 역사와 전통, 자부심, 3박자를 모두 갖춘 백골부대, 제3 보병사단의 전설적인 일화들과 고 박정인 장군의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은 다가오는 호국보훈의 달에 북한의 기관총 도발에 100배로 갚아준 백골부대 박정인 장군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백골부대는 1973년 북한군의 기관총 도발에 포격으로 대응하여 북한군 GP를 완전히 초토화시킨 이후부터 북한군 전방 부대에게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입니다. (절대 과장이 아닙니다!)



1961년 박정인 장군이 전방 연대장으로 복무할 때의 일입니다. 당시에 군사분계선의 분위기는 북한군이 마음대로 들락거릴 정도로 아군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장면을 몇 번이나 직접 목격한 박정인 장군은 해당 중대장에게 "적이 군사분계선을 넘어오는데 왜 가만히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일선 중대장과 대대장의 대답이 정말 어이가 없었는데.. "북한군을 건드리면 보복하기 때문입니다."였고, 화가난 박정인 장군은 일갈을 날렸습니다.


"대대장의 총과 무기는 목숨을 걸고 조국의 땅을 지키라고 준 것이다."

"그게 대한민국이 당신을 무장시킨 유일한 이유다. 우리 지역에 침투하는 적은 즉각 사살하거나 포로로 하라."



이후 군기확립을 위해 박정인 장군은 '백골용사 선서문'을 제정하여 부대 행사나 장병 전출입 신고 시 큰 소리로 낭독하도록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백골용사 선서문>

1. 백전백승의 백골사단 용사임을 영광으로 삼는다.

2. 죽음을 무릎쓰고 명령에 복종하고 책임완수로 조국과 민족에 충성한다.

3. 모든 법규를 준수하고 전우를 사랑하며 모든 일은 '전투기준'으로 생활한다.

4. 훈련을 실전 삼아 일당백의 전기를 연마한다.

5. 화랑도 정신으로 실지를 회복하여 통일조국을 후손에게 물려준다.

6. 죽어서 백골이 돼도 조국의 수호신이 되어 민족사에 이름 석자의 명예를 남긴다.



이후 박정인 장군은 군사분계선을 수시로 넘어오는 북한군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부대내 특공 소대를 편성했는데,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북한군이 군사분계선을 또 넘어왔고, 사단 수색중대가 이에 대응사격을 하면서 양측이 교전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이때 편성된 특공 소대가 일시에 투입되어 대응을 하였고 부상을 입은 북한군 5명을 생포하기에 이릅니다. 



북한군 5명이 포로로 잡히자 북한군은 곧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추가 도발을 계획합니다. 이때 상황을 지켜보던 박정인 장군은 확성기를 들고 북한군을 향해 "올 테면 와라!, 전차로 증강한 1개 연대가 대기하고 있다."라고 외쳤습니다. 이후 박정인 장군의 강단에 전차로 증강했을 거라는 예상을 못했던 북한군은 겁에 질렸고, 포로가 된 북한군을 포기하고 그냥 돌아갔습니다^^



이후에 백골부대 사단장이 된 박정인 장군은 6.25 전쟁이 끝나고 사라진 '백골' 구호를 다시 부활시켰고, 총검술 훈련 중 부대원들이 남쪽을 향해 훈련하는 것을 보고 "왜 부모가 계신 남쪽을 향해 총검을 휘두르느냐, 김일성이 있는 평양을 향해 총검술 훈련을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또한 훈련장에 화장실 소변통이 남쪽으로 설치되어 있는 것을 모두 북쪽으로 바꾸는 등 이처럼 박정인 장군은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무장된 최고의 군인이었고, 그의 소신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군인이었습니다. 


1973년 3월 7일, 오후 1시 20분, 그가 백골부대 사단장으로 있을 때 긴급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철원 비무장지대에 표지판 보수작업을 마친 후 귀대하던 백골부대원을 향해 북한군이 기습 총격을 가했습니다."


이 도발 때문에 백골부대원 장교 1명이 사망하고, 부사관 1명이 중상을 입게 됩니다. 보통 이런 상황에는 상부에 상황을 보고하고 지시를 기다리지만...

보고를 받은 박정인 장군은 그 즉시 현장으로 출동하여 도발 중인 북한군들에게 사격 중지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북한군은 이를 거부하고, 백골부대 부상자를 포함한 소대 병력에게 계속 총격을 가했습니다. 


곧 박정인 장군은 이후 백골부대의 전설이 된 결단을 내립니다! <3.7 완전작전>



사단 내 포병대대를 총동원해 보복하기로 마음 먹고, 관측된 북한군 GP를 향해 105mm, 155mm 곡사포를 일제히 발사했습니다. 이때의 포격은 휴전 이후 한국군이 처음으로 북한 지역에 대규모 포격을 가한 사건이 되었고, 박정인 장군은 휴전 이후 최초로 북한군을 향해 포사격을 지시한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대규모 포격으로 놀란 북한군은 사격을 멈추고 일제히 도망쳤습니다. 그의 결단은 북한군에게 당한 아군을 구하고, 수시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도발하던 북한군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부대로 돌아온 박 장군은 부대원들에게 기습 총격을 가하고, 휴전협정을 먼저 어긴 북한군과 김일성에게 군사분계선을 지키는 백골부대의 무서움을 보여주기로 다짐합니다.



그날 사단 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군차량을 총동원하여 보란 듯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군사분계선 남방 한계선 바로 코 앞까지 돌진했습니다. 당시 이 상황이 얼마나 긴박했으면, 김일성은 즉시 전군에 비상동원령을 내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1975년 귀순한 북한군 유대윤 소위의 증언>

"당시 백골부대의 포사격으로 인민군 막사에 있던 북한군 36명이 사망했다. 지금도 북한군은 백골부대를 가장 겁내는 부대"라고 증언했습니다. 



박 장군의 회고록에는 당시 북한군이 단 한 발도 대응 포격하지 못한 것을 지적하며, "북한 공산당은 약자에게 강하고, 강한 자에겐 더없이 약하다."라며 북한이 도발할 때 강력한 응징이 따르면 북한군은 금방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발생한 후 10여 년이 지난 1985년 9월 20일, 함경남도 도민희 회장은 남북 이산가족 평양방문단의 자격으로 평양호텔에 투숙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북한 정치보위부 고위간부가 그를 찾아와 묻기를.. "함경남도 신흥군 출신의 박가 성을 가진 요란한 사단장 요즘 뭘 하오?"라고 물어보면서 증오에 찬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한군군에도 패기와 용기로 북한군의 도발에 즉각 대응을 할 수 있는 군인이 있다는 것을 북한은 그 때 알았을 것입니다.)


박정인 장군은 포격사건 이후로 한 달 만에 군복을 벗었는데, 그 당시 군의 작전명령권은 미군에 있었고, 상부에 보고 없이 북한군에게 공격을 지시한 책임이었습니다. 


2013년 7월 29일 박정인 장군의 인터뷰 내용에는 "괴뢰군은 몇 번이나 도발해도 그만인데 우리는 거기에 대응하면 정전협정 위반이라고 처벌하니 부대의 사기가 어떻게 되겠느냐?" 그래서 내가 본때를 보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사격을 하고 옷을 벗었다. 강하게 나가면 그들은 꼼짝 못한다. 적이 침범하면 즉각적으로 대응해 자기들의 책임 구역을 지켜야 한다. 국가가 준 무기를 가지고 국가가 준 부하들을 데리고 응징해야 한다. 그게 군인이다!




비록 이 사건으로 보직해임 전역을 하게 됐지만.. 그의 결단으로 이루어진 작전은 이후 전방에서 발생한 수없이 많은 북한군의 도발에 가장 성공적이고 모범적으로 대응했던 완전작전으로 전해지면, 대한민국 육군과 백골부대의 전설로 알려졌습니다. 



박정인 장군의 과감하고 즉각적인 대응으로 사건 이후 북한군은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북한의 전후방 사단이 통째로 교체되는 수모를 겪었고, 그 당시 북한 지휘관들이 거의 모두 교체되었으며, 백골부대를 상대하기 위해 3개 사단이 추가로 전방에 더 배치되는 등 북한은 자신들이 먼저 도발을 하고 오히려 전방 경계를 더욱 강화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백골부대의 위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북한이 백골부대를 이처럼 무서워하는 이유는?


1. 선전포고와 같은 강력한 구호! (미친개 몽둥이가 약! 약! 약!)



덤빌 테면 덤벼라! 끝장내겠다!라는 식의 강력한 구호는 실제 북한군이 언론을 통해서 당장 내리지 않으면 보복을 가하겠다고 나설 만큼 백골부대의 패기를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2. 기관총 도발에 즉시 포격으로 100배 대응!



북한군의 기습도발에 의해 아군 사상자가 발생하자, 즉시 현장으로 출동해 일단 사격 중지 요청을 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즉시, 도발 원점 확인과 함께 사단 포병대대를 총동원해 북한군의 도발 원점에 포격을 가해 북한군 소대를 전멸시킨 점입니다.


3. 괜히 침투했다가 일망타진 된 무장공비



1992년 5월 22일 국군 군복 차림으로 위장한 무장공비 3명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곧 백골부대 수색대와 정찰부대에 의해 순식간에 일망타진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5.22 완전작전으로 월남전을 제외한 국군의 작전에서 최초의 을지무공훈장 군인을 배출한 작전으로도 유명합니다. 


4. 북한 도발에 대응 우수부대 (7.16 완전작전)


1997년 7월 16일, 또 한 번 북한군이 군사분계선을 넘는 도발을 하는데, 3.7 완전작전에서 박정인 장군이 사단장으로 있을 때 대패했던 부대 소속의 북한군 14명이 중동부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오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당시 23분이라는 시간동안 국군과 북한군 사이에서 300여 발의 소총과 포사격에 의한 교전이 발생했는데, 아군은 한 명의 피해도 없이 북한군 3명 사망, 2명이 중상을 입는 등 양측 교전에서 대승을 이룹니다. 


이 사건은 3.7 완전작전 이후 북한군의 같은 부대가 또 한 번 백골부대에 참패하자 북한군 해당 부대의 간부들이 모두 숙청당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는 이후 귀순한 북한군 장교의 증언에 의해서 밝혀졌습니다


5. 도발을 해도 백골부대만은 피하자!



백골부대에 의해 여러번 대패한 북한군은 1997년 7.16 완전작전 이후 2001년 군사분계선 월경 사건 1회를 제외하면 백골부대가 주둔한 철원 일대는 단 한 번도 도발한 일이 없습니다. 이는 북한군 사이에서도 백골부대는 일부러 피해서 도발한다는 것을 그동안의 파주나 연천 일대의 사건들을 보면 일부러 백골부대가 주둔한 곳은 피하는 듯한 모습을 확실히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처럼 박정인 장군의 군인정신은 지금도 백골부대의 전통으로 그대로 남아 국군 최고의 메이커 부대이자, 북한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국군 부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치며.. 2015년 8월 4일 DMZ 목함지뢰 매설 사건은 북한군이 DMZ를 침범, 목함지뢰를 설치하여 국군이 피해를 입었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DMZ의 국군의 작전 개념은 '저지'에서 '격멸'로 전환되었습니다. 남북 군사 충돌은 분명 큰 피해를 가져옵니다. 전쟁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되지만, 그들의 도발로 국군과 민간인의 피해가 발생한다면 결코 당하기만 하는 일은 앞으로 없어야 하겠습니다. 



"북한군이 기관총을 쏘면 우리는 대포로 적을 응징하는 것이 군인의 임무다."

-백골부대 전설 고 박정인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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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창군이래 가장 큰 업적을 이룩한 제6 보병사단 청성부대.


"죽을 수는 있어도 질 수는 없다."

오늘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꾸어 놓은 세계 육군 역사에 남을 업적을 이룩한 제6 보병사단 '청성부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6사단 청성부대는 1948년 4월 29일 서울 은평구 수색동에서 창설된 '조선 경비대 제4여단'이 시초였습니다. 그 후 2개월 뒤인 6월 14일 충북 충주에서 지금의 제6 보병사단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사단으로 승격된 뒤, 강원도 원주에서 주둔하였고, 이후 춘천지역 일대의 38선 경계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때 사단장이 '김종오 사단장'입니다. 



그는 북한군의 남침이 의심되자 이에 대비하여 주둔 지역의 진지 공사와 병사들의 군사교육, 전투훈련 등으로 만일의 사태를 대비했습니다. 6.25 전쟁 시작과 함께 국군의 대부분 부대가 북괴군에게 개전 초기에 섬멸되거나 후퇴했던 것과 다르게 김종오 사단장이 이끄는 6사단 청성부대는 북괴군의 남침에 미리 대비하였기 때문에 이후 상상할 수도 없는 큰 업적을 세우게 됩니다. 


제6 보병사단 청성부대의 전설적인 업적



한국 전쟁 발발 당시 북한군의 병력은 국군의 약 2배였으며, 전쟁 물자 역시 이미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은 남침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북한군의 남침전략



북한군 1군단이 서부전선에서 서울을 점령한 후, 2군단이 동부전선에서 춘천을 점령하고 수원으로 진격하여 서울에서 후퇴한 국군의 주력부대 후미로 돌아 차단한 후, 1군단과 앞뒤에서 포위하여 섬멸하는 전략입니다. 



6.25 전쟁 하루 전, 6월 24일 당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그동안 유지했었던 국군의 비상경계령을 해제시켰습니다. 때문에 장병들의 외출과 휴가로 전선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개전 초기 북한군의 물량공세에 국군은 맞서 싸울 인원조차 부족한 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김종오 사단장은 6사단장에 부임한 후 전쟁이 임박했음을 직감했고 전선에서 장병들의 휴가 대신 군사교육과 정신교육, 방어 진지 공사를 함으로서 개전시 북한군들을 맞아 잘 싸울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1. 춘천 전투의 업적 


6.25 전쟁 발발과 동시에 완전 무장한 북한군의 기세에 당시 국군의 다른 사단들은 패배와 후퇴를 거듭했지만, 6사단 천성부대는 홀로 후퇴없이 춘천지역을 사수하며, 밀려오는 북한군들을 모조리 격퇴시킵니다. 더 가공할 일은 1개 사단이 북한군 1개 군단을 맞아 싸우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오히려 역습을 감행하여 더 큰 피해를 입히는 등 용맹함과 대범함까지 보였습니다. 



북한군의 원래 계획대로라면 북한군 2사단 병력이 춘천과 가평을 경유해서 후퇴하는 국군을 포위한 후 섬멸 작전을 펼쳐야 하는데 당시 청성부대가 미리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군 2사단의 계획은 실패합니다. 

이때 북한군 2사단은 7연대 자주포까지 대동한 기갑부대를 투입하여 청성부대의 방어 진지를 뚫으려 하지만 오히려 청성부대 특공대의 육탄 화염병 공격에 자주포는 파괴되고 말죠.  

이때 운용되었던 자주포가 북한에서 지금도 운용 중인 SU-76 자주포입니다^^



이렇게 북한군 2사단의 계획이 실패한 후, 7연대까지 대패하자 북한군은 무리수를 둡니다. 사단 예비전력인 17연대까지 합동하여 청성부대의 방어선을 뚫으려고 했는데, 오히려 청성부대에 의해 2사단 전력의 40%가 궤멸 당합니다. 



당시 국군의 상황을 알아보면, 

완전 무장한 북한군에 비해 병력과 장비는 너무나 열악하였고, 국군의 사단 규모 자체도 1만여 명이 안되는 수준이었습니다. 탱크를 앞세워 돌격해오는 북한군과 다르게 전투에 대한 개념 자체도 부족한 실정이었지만 6사단 청성부대는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북한군의 남침 전략의 전반을 흔들어 놓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이렇게 6사단 청성부대가 막강하게 대응하자 북한군 2군단장 김광협은 6사단을 포위하여 완전히 섬멸하기 위해 홍천으로 향하고 있던 12사단과 603 모터싸이클연대를 회군시켜 청성부대가 주둔한 춘천 점령을 명령합니다. (북한군 2군단장 김광협의 판단은 이후 2군단의 몰락의 원인이 되죠.)


북한군 12사단이 2군단과 합류하여 공격해오자 청성부대는 큰말고개와 원창고개에 다시 방어선을 만들고 싸웠는데, 이때 북한군 병력과 함께 전차 10여 대를 다시 격파하면서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또한 김종오 사단장의 명령으로 북한군 12연대를 맞아 싸우고 있던 국군 2연대를 지원하러 보냈던 16포병 대대는 북한군 12사단이 회군하자 12사단과 603모터싸이클부대를 역습, 화력을 쏟아부어 궤멸시켜버리는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청성부대의 활약으로 북한군의 남침전략이 틀어지자 북한군 7사단이 2군단과 합세하여 다시 춘천 공략에 나서자 당시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전선의 단절과 청성부대가 고립, 섬멸될 것을 우려하여 김종오 사단장에게 전략적 후퇴를 명령하였고, 결국 7월 1일 6사단은 춘천을 북한군에게 내어주고 충주로 후퇴합니다.



당시 상황을 다시 종합해보면, 개전 후 이미 수도가 함락되었고, 국군의 주력부대가 패퇴한 상황에서 6사단 청성부대는 중동부전선에 홀로 남아 남하 중인 북한군 전력의 반을 소멸시켜버렸습니다.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6사단 청성부대는 북한군 2군단에 비해 엄청난 열세를 알 수 있습니다. 기계화는 커녕 제대로 된 장비도 없는 상태였고, 병력 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는 차이를 보였으며, 소련에서 지원받은 장비로 무장한 북한군을 상대로 이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춘천 전투에서 양측 피해 현황만 살펴봐도 6군단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습니다. 편제도 제대로 안 된 상황에서 김종오 사단장의 지휘 아래 춘천, 홍천, 인제 일대에 구축한 방어선으로 북한군 1개 군단(2군단)을 6사단 혼자서 궤멸시켰습니다. 결국 UN군의 상륙과 부산으로 진격하는 북한군의 주력 부대의 남하를 지연 시킴으로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꾸어놓는 전과를 올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한 달 뒤, 1950년 11월 25일, 중공군의 개입 



북한군의 전세가 기울어지자 중공군 대규모 개입으로 국군과 연합군은 1.4후퇴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 해 4월 공세에서 사단은 화천군 사창리 전투에서 중공군을 맞아 싸우다가 방어진지를 포기하고 후퇴를 결정, 대패하게 되죠. 

그 후 김종오 사단장의 교통사고로 장동영 장군이 6사단자에 임명되었고, 6사단을 다시 재편성하여 용문산을 주 방어선으로 하여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하였습니다.


중공군에게 참패 이후 이를 갈던 6사단은 이후 용문산 전투에서 6.25 전쟁뿐 아니라 세계 육군의 역사에 남을 최고의 전과를 올립니다.


당시 장도영 사단장은 청성부대 3개 연대 중 1/3 병력인 2연대를 주 방어선보다 전방인 북한강 인근에 배치하는데 부족한 병력으로 뭉쳐서 싸워도 질 것이 뻔했는데.. 오히려 병력의 1/3을 전방 정찰조로 보내다니.. 2연대의 전투력을 믿었던 것일까요? 


3. 용문산 전투의 업적 


그림처럼 6사단 19연대는 서쪽 방어, 7연대는 동쪽에서 방어선을 지키고, 2연대는 전방에 나가 북한강을 마주보고 방어리인을 배치했습니다. 곧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2연대 예하 1대대와 2대대는 중공군을 공격하였고, 곧 후퇴하여 후방 427고지로 후퇴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점은 1개 연대가 3개 사단을 상대로 공격과 후퇴를 했으면, 이후 당연히 후방의 본대에 합류하여 싸워야 하는데, 2연대는 무슨 이유에선지 427고지에서 후퇴하지 않고 중공군 3개 사단과 예하 포병대의 총공세를 막아내고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점은, 6사단 2연대가 완강하게 버티자 중공군은 2연대의 방어라인이 6사단 주력부대의 주 방어라인으로 착각하여, 모든 병력(3개 사단)을 총동원하여 2연대를 공격했습니다. 


이때, 후방의 주 방어선에 있던 6사단 7연대와 19연대는 잽싸게 중공군의 후미로 돌아 포위하여 반격을 시작합니다.



당시 중공군들은 자신들의 총 병력인 3개 사단을 앞에서 방어하고 후미에서 국군의 거센 공격이 이어지자 자신들보다 많은 병력이 공격해 온다고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는데, 결국 3개 사단 병력이 1개 연대에 막여 패주하는 꼴이 되었고, 중공군은 양평에서 춘천 그리고 화천까지 무려 80km를 도망만 치다가 화천저수지에서 모두 전멸하고 맙니다. (세계사에 총이 생겨난 이래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방어작전 사례로 알려짐.)



결과적으로 용문산 전투는 1개 사단(대략 1만 명)이 적 1개 야전군(대략 10만 명)을 궤멸시킨 전투입니다. 6사단 청성부대가 왜 국군 최고 사단인지 알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세계 육군의 전설, 6사단 청성부대의 업적을 정리하면,


1. 국군 최초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음 (6사단 7연대 예하 2대대가 북한군 15사단 48연대를 섬멸시킴)

2. 6.25 전쟁 최다 업적 (154회 전투 / 92,669명 사살 / 6,437명 포로)

3. 국군/UN군 최초 압록강 입성

4. 전군 유일 38선 방어 성공

5. 북한군 1개 군단 전투력 상실(춘천 전투)

6. 1개 사단으로 1개 군단 급을 궤멸 시킴 (총기 탄생 이후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방어작전)

7. 제2 땅굴 발견

8. 최초로 보병 육탄공격으로 적 전차 파괴


이처럼 6사단 청성부대의 모든 업적을 한 단어로 줄이면,, '전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치며, 이제 얼마 뒤면 6월입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조국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호국영령들과 참전유공자들의 헌신을 기억하는 6월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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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언월도, 큰 쇠자루의 끝에 달이 누운 듯한 도(刀)를 용이 물고 있는 모습을 한 '대도류 병장기'로 무기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벌써 머릿속으로 삼국지의 관우를 떠올리고 계실지 모르겠네요 ^^. 멋들어지게 흘러내린 흰 수염을 흩날리며 한 손에는 청룡언월도를 쥔 관우의 모습은 강함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영웅들과 그들과 운명을 함께 했던 무기들은 많이 있지만 대도류 병장기는 동양의 무기가 가지는 신비로움과 함께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 어떤 힘이 존재하는 거 같습니다.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관우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무인들 중에 현대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캐릭터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니고 있는 80근(48kg)에 달하는 청룡언월도 역시 그의 캐릭터와 가장 잘 어울리는 '필살 아이템이'이죠.



중국의 청룡언월도는 80근인데 이걸 어떻게 휘둘러?


명나라의 병법가 모원의도가 말하길 "청룡언월도는 기예의 웅장함은 보여줄 수 있으나 전장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80근이나 되는 무게 때문인데.. 

80근으로 말하자면 48kg 정도의 무게입니다. 이것을 전장에서 자유자재로 사용할 정도라면 체격이나 힘이 일반인들보다 배는 되어야지 가능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단지 관우라서 가능했던 것일까요?



그런데 실제로 우리 역사에서 실존하는 인물 중에 관우 못지않은 청룡언월도의 고수가 3인이나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실제로 더 많은 무인이 청룡언월도를 사용했지만 오늘은 그중에 가장 유명했던 고수 3인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그럼 지금 저와 함께 우리 역사 속의 청룡언월도의 고수를 찾아 함께 떠나보겠습니다. 



청룡언월도!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에 의해 전파되다

그런데 무게가...


하지만 전장에서 조선의 일반 무장들이 사용하기에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무게였습니다. 한 번 휘둘렀다가는 자신도 함께 날아갈 정도였으니까요..

이쯤 되면 아무리 좋고 멋진 무기라도 뭔가 변화를 줘야겠죠?


당장 무거운 장식과 크기를 줄이면서 파워가 조금 약해졌지만 대신 도의 날은 더욱 서슬이 퍼렇고 가볍게 제작되어 적과 조우했을 때 이 병기를 휘두르면 적들의 간담이 서늘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후 조선 후기의 무관들은 일본의 왜검을 수련하였고, 기병은 청룡언월도를 이용한 마상월도(馬上月刀)를 수련하였습니다. 




본격!

한국사 속의 청룡언월도 고수를 찾아라!



제1 고수, 효종 (1619~1659) 


내 기필코, 이 굴욕을 갚고야 말테다. 

이 조선을 부강하게 만드리라.


조선 제17대 왕이며, 인조의 차남으로 병자호란 이후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서 8년 동안 수모를 겪으며 볼모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귀국 후 소현세자가 돌연 사망하자 효종이 세자에 책봉이 되는데 1649년 즉위하여 '삼전도의 굴욕'과 인질 생활의 굴욕을 갚고자 북벌을 주장하며 군제의 개편과 군사훈련에 올인하게 됩니다.



▲유물로 남아있는 효종의 청룡언월도와 철퇴

그는 그와 뜻을 함께하는 무관들과 북벌을 위해 기병과 조총수, 살수를 양성하는데 모든 전력을 기울였으며, 오직 북벌만을 생각하면서 자신 또한 언월도와 철퇴를 들고 무공 수련에 온 힘을 다 쏟았다는데..


그런데 저 무겁기로 소문난 언월도와 철퇴를 들고 어떻게 수련을 했을까요? 

보통 임금이라면 유약하고 심약하고.. 그런 느낌이잖아요?




타고난 무골, 피맺힌 한


무장들도 휘두르기 어려운 청룡언월도를 들고 말을 달릴 정도로 효종의 체격이나 힘은 장사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군제를 개편하고 그 오랜 시간 동안 왕인 자신이 직접 언월도를 들고 무공 수련을 하며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마도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아버지 인조의 굴욕을 두 눈으로 지켜본 아들의 피맺힌 한이였을 거 같습니다.





제2 고수, 장조 사도세자 (1735~1762) 


조선의 검신, 김체건과 

당대 최고의 무술가들에게 배우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능했던 그는 위에서 언급했던 고조부인 효종을 빼다 박았다고 할 만큼 무인의 기질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습니다. 

어릴 때는 매우 영민하여 아버지 영조에게 무한 사랑을 받았지만 차츰 공부와는 담을 쌓았고, 사춘기 소년마냥 무예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의 주위에는 당대 제일검으로 불렀던 검신 김체건과 최고의 무술가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쉽게 말한다면 왕이 될 사람이 무인의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 



이런 환경에서는 누구라도 당연히 무술을 좋아할 수밖에 없겠죠. 더구나 14세 어린 나이에 고조부의 청룡언월도와 철퇴를 들고 무술 수련을 할 만큼 타고난 무골이었고 이미 어린 나이에 상당한 무공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협지로 이야기한다면 천하제일검 스승의 몇 갑자 내공을 전수받은 제자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거 같군요^^ 


그리고 만에 하나 그가 죽지 않고 왕이 되었다면, 고조부 효종의 북벌의 정신이 깃든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만주 벌판을 달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랬다면 조선의 영토는 만주지역까지 이르며 지금은 중국과 대등한 국가로 발전하지 않았을까 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봅니다.




▼무사 백동수의 백동수역(좌), 여운역(우)


제3 고수, 백동수 (1743~1816)


강한 조선을 꿈꾸었던 조선의 협객


우리 역사에 존재했던 무술 고수들 중에는 무협지에 등장해도 될 만큼 뛰어난 무인들이 많습니다. 그중에는 '최고의 무사' 타이틀에 항상 포함되는 인물들이 있는데 오늘 소개해드리는 한국사 속의 청룡언월도 고수 3인 중 마지막 인물인 무사 백동수가 그 주인공입니다. 


조선 후기의 무인으로 기병술, 활쏘기 등 다양한 무예에 소질이 있었고, 당시 조선의 검신으로 불렀던 김체건의 아들인 검선 김광택에게 검술을 배웠던 인물입니다. 검신의 아들 검선에게 무술을 전수받았다면 그의 무공 수위가 얼마나 높았을지 짐작할 수 있을 거 같네요.



조선 기병 무기의 최고봉! 청룡언월도


강한 조선을 지향했던 백동수는 무예가 뛰어났던 장교 몇 명과 함께 당시 군영마다 달랐던 무예 기법들을 기병 무예 18가지와 마상무예 6가지로 합쳐 '무예도보통지'를 만들었으며, 전국 팔도의 군영에 훈련 교범으로 보급합니다. 

최근 방영했던 드라마 '무사 백동수'에서는 검술에 관련된 영상이 대부분이었는데 실제 무사 백동수는 청룡언월도를 이용한 마상월도의 고수 중에 고수였다고 전해집니다.


마상월도(馬上月刀)

말을 타고 달리면서 월도를 사용하는 기법으로 조선의 기병들이 필수로 익혔으며, 무예도보통지의 그림 중 유일하게 수염을 기른 시연자가 있는데, 일반 무사들이 쉽게 펼칠 수 있는 기예가 아니기 때문에 그가 바로 백동수라고 지금까지 추측하고 있습니다. 



오늘 준비한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도전하는 국가는 창대하고 안일한 방법으로 살려고 한 국가는 쇠퇴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인류 역사가 보여주는 진리인 거 같습니다. 

'평화는 우리 힘이 강할 때만 보장된다'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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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1980년대 일명 '개구리복'으로 불렀던 교련복을 입고 학교 운동장에 모여 군사훈련을 받았던 시절. 운동장 한편에 모여 모형 총기를 들고 남학생들은 총검술과 제식훈련을 받았었고, 여학생들도 일명 예외 없이 구급교육을 받는 광경은 그 시절에는 학교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교련은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재학 중인 남녀 학생들을 상대로 실시된 군사 관련 교육훈련을 실시하는 필수 과목이었습니다. 지금은 상상도 안되는 교련 과목이 당시 생겨난 배경은 1968년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려 했던 김신조 사건이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69년부터 남녀 고교의 필수 과목으로 채택되었었죠.

이때부터 전국 모든 학교에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일주일에 1번에서 2번 정도 교련 수업을 받았습니다. 


▲교련 선생님으로부터 제식훈련을 받고 있는 모습입니다. 


당시 교련을 담당한 선생님은 군인 장교 출신이었고, 학교 내에서 가장 무섭고 파워가 막강했습니다. 교련 선생님께는 오로지 복종만이 살길이었죠^^

교련 수업이 있는 날에는 거의 모든 학교의 운동장에서 학생들의 구령 소리와 기합소리가 하루 종일 들렸었고, 1년에 단 하루, 교련 실습 평가를 받는 날은 정말 큰 행사였습니다. 



▲중앙에 있는 학생이 학생 연대장입니다. 


진짜 군인들보다 늠름한 모습입니다. 

학생 연대장은 전교에서 공부를 잘 하는 모범생이었고 특히, 학생들 사이에서 리더십도 있어야 했기 때문에 학생 연대장이 되면 교련 선생님 못지않게 학생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죠. 


▲학생 행렬


하얀 천을 목에 두르고 교련복을 입은 모습은 당시 군인들의 군복보다 멋졌습니다. 

행렬 중에 '우로~ 봤' 포즈. 



▲교련 시, 총검술과 제식 훈련


이때는 학교에 무기고가 따로 있었습니다. 실제 총기뿐 아니라 카빈, M16 모형 총기가 무기고에 항상 있었고, 교련 수업이 있는 날에는 학생들이 모두 교련복으로 입고 무기고 앞에 서서 총을 지급받는 모습은 지금 군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군인들보다 각이 살아있는 사격자세!



▲벌을 받고 있는 학생들


교련 수업을 받기 위해서는 교련복과 각반, 요대, 교련모 등 준비물을 챙겨야 하는데 당시에는 교련 수입이 시작하기 전에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 오지 않은 학생들을 따로 교련 선생님이 체벌을 가하거나 얼차려를 주는 훈훈한? 모습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가장 잘 빼먹는 준비물은 아마도 각반?



▲총기 분해와 조립 중인 학생들 



▲학생 교련 실습 평가일




당시 교련 수업은 여학교에서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여학생들은 주로 붕대감기와 구급법, 환자 이송법 등을 배우면서 전시에 간호 장교와 같은 역할을 했으며, 이 때문에 각 가정에 붕대가 없는 집이 없었고, 붕대 감는 법 또한 모르는 가정이 없었죠.



▲군용 들것을 놓고 환자 운송에 대한 수업을 받는 모습.



▲방독면을 착용 중인 여학생들.





1970년~1980년대에는 각 학교에서 필수과목이었던 교련 수업은 교련 선생님의 지도하에 굉장히 힘들게 진행되었던 수업이었는데 1980년대 말이 되면서 대부분 교육과정이 바뀌어 1992년부터는 교련 수업이 군사훈련에서 응급처치술 등을 배우는 것으로 바뀌었고, 그 이후에는 점차 대다수의 학교에서 교련 수업 자체를 폐지하게 됩니다.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추억이기도 했던, 그 시절의 교련 수업과 관련된 내용이었습니다. 

 

▲영화 '친구'에 등장했던 장동건의 교련복 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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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는 육군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 전투부대가 있습니다. 1947년 이전 한국에는 아직 전투사단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기였습니다. 그들은 한국전쟁 이전에 육군 최초로 창설되어,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을 상대로 112전 전승으로 무패의 신화를 창조한 사단으로 '제1보병사단', '1사단'이라고도 불리며, '전진부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들이 '최강부대'라는 명성을 이어오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천하제일 부대, 그리고 역사의 시작


1947년 12월 1일, 수도권 3개 여단이 창설되었고, 그중 1여단이 제1사단의 시초였습니다. 한국전쟁 이전에 창설되어 그 유명한 1948년 송악산 전투에서 육탄 10용사가 속한 부대였으며, 이후 발발한 한국전쟁에서는 베티고지 전투, 다부동 전투, 평양에 제일 먼저 입성한 부대로 북한군과 112전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천하제일'이라는 별명을 가진 한국 육군의 역사를 가진 부대입니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월 22일 백선엽 대령이 제5대 사단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제1보병사단 마크

'부대마크의 의미'

숫자1 - 국군의 최선봉 1사단의 단결과 충성심을 뜻함.

노란색 - 국가의 방패를 뜻함.

파란색 - 민주주의 수호를 뜻함.


전진부대는 사단 창설 이후 1971년 3월 수도권 방어의 최선봉 부대로 현재 한국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파주에서 국토 수호를 담당하고 있으며, 개성공단 출입로와 도라산역, 도라 전망대, 대성동, JSA 등 서부전선 DMZ, GP, GOP의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대한민국 최일선 부대입니다. 



육탄 10용사도 전진부대 소속


1949년 5월 3일 새벽, 북한은 전쟁 준비를 모두 완료한 다음 당시 한국군의 전투력을 시험하기 위해서 개성의 송악산을 인민군 제1사단 병력 1천 명을 동원해 점령하게 됩니다. 



당시 북한군이 점령한 고지들을 탈환하기 위해 다음날 반격을 시작했지만 이미 북한군이 고지에 설치한 토치카에서 쏟아지는 총탄으로 아군의 피해는 커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제1사단의 서부덕 상사가 포함된 10명의 특공대가 만들어지는데 이들은 박격포탄과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적진을 향해 육탄으로 돌격해서 결국 빼앗긴 고지들을 다시 탈환하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지금까지도 제1보병사단의 영웅으로 알려진 송악산의 육탄 10용사입니다. 



낙동강 방어선을 지킨 1사단 영웅들


전쟁 개시 후 북한군은 빠르게 남하를 전개해 서울을 비롯해서 대전을 점령하고 남쪽으로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옵니다. 이에 국군과 미군은 최후의 보루로 낙동강 방어선을 설치하는데 당시 가장 치열했던 곳이 구국의 3대 전투로 일컫는 '다부동 전투'였습니다. 

외국에서는 이 전투를 한국전쟁 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투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당시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게 되면 북한의 적화통일은 불을 보듯 뻔한 결과로 여겨졌습니다. 




북한군 3개 사단은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제1사단이 가장 쉽게 돌파될 것으로 예상하고 공세를 퍼부었는데 1사단은 결코 만만하지가 않았고, 당시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1사단은 무려 25일 동안 적 3개 사단의 막강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의 '8월 대공세'를 저지하면서 대승을 이루게 됩니다. 



이렇게 제1사단은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대구와 낙동강 이남 지역을 북한군으로부터 지켜내고,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진 다음 1950년 10월 19일 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한 사단이 됩니다. 



평양에 선봉으로 입성한 최강 제1사단


1950년 10월 19일 국군 최초 평양 선봉 입성을 기념하면서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계속 전진하여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라'라는 의미인 '전진' 휘호를 부여받아 지금까지 '전진부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한국전쟁 당시 적군 82,000여 명 사상, 6,900여 명의 포로를 잡는 등 북한군과 총 112전의 전투에서 무패의 전설을 기록하며 가장 먼저 평양에 입성합니다. 


▼평양 입성 직후 미1구단장에게 평양 탈환 작전을 설명 중인 백선엽 당시 1사단장


이렇게 1사단은 개전 전에 편성되어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사단 건제를 유지했던 최강 사단으로 지금까지도 평가받고 있으며, 미군이 가장 신뢰했던 유일한 국군 사단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진부대에는 4명의 영웅이 더 있습니다.


1사단 이종명 대령과 정교성 중사, 김정원 하사, 하재헌 하사의 이야기입니다. 


▼이종명 대령(이미지-SBS뉴스)


이종명 대령은 2000년 6월 1사단 수색대대장으로 복무 시 DMZ 수색정찰 도중 지뢰 폭발로 부상을 입은 후임 대대장을 돕다가 자신마저 지뢰 폭발로 두 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게 됩니다. 급박한 상황에서 부하들의 접근을 막으면서 '위험하니 내가 간다'라는 말과 함께 부상당한 몸으로 포복하여 후임 대대장을 부축해 탈출한 전진부대의 영웅입니다. 


▼김정원 하사, 정교성 중사, 하재헌 하사(이미지-조선일보)


2015년 8월 4일 아군 GP 통문 앞 출입구에 북한군이 설치한 목함지뢰의 폭발로 당시 김정원 하사는 발목 절단, 하재헌 하사는 양쪽 다리가 절단되는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당시 위급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부상자들을 구호하는 모습은 한국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불굴의 의지로 싸웠던 전진부대 장병들을 투혼을 보는 듯했습니다. 

112전 전승의 무패신화를 만든 최강 부대인 제1보병사단, 그들이 있기에 대한민국 오늘도 평화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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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장사정포는 우리나라의 수도권에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는 북한의 대표적인 비대칭 무기입니다. 장사정포의 무서운 점은 저비용의 강점을 이용해 북한이 대량으로 전력화하여 목표 지역에 화력을 집중해서 타격을 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 대한민국 육군은 보유한 첨단 무기체계와 한미 연합 감시자산을 총동원하여 북한의 기습 또는 도발 징후가 예상될 때 북한 장사정포를 일격에 박살 낼 수 있도록 만반의 대비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심인 '육군 화력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육군의 대표 무기인 M270 MLRS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M270 MLRS 막강 화력


M270 MLRS 1대의 화력 = 북한 2개 포병대대의 화력


'강철의 비'란 별명은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 미군의 M270 MLRS 공격으로 이라크군 미사일 기지 30여 곳과 약 200대의 장갑차가 순식간에 파괴되어 이라크군이 이 무기의 무서움을 느껴 붙여준 별명입니다.

M270 MLRS (다연장 로켓 발사기 Multiple Launch Rocket System)는 1976년 냉전 시기에 소련의 막강한 기갑전력을 상대하기 위해 미국에서 개발되어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에서 주로 운용하고 있습니다.



M270 MLRS은 현재 주한미군 육군 210화력여단과 대한민국 육군 제5포병여단이 보유하고 있으며, 북한의 '서울 불바다' 위협에 1997년 미국으로부터 1개 대대의 도입 후 현재는 97문을 배치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미 육군 210화력여단은 한반도에 배치된 지상전력 중 가장 강력한 화력을 보유한 부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M270 MLRS 제원]

중량: 26톤

승무원: 3명

차량속도: 640km/h

엔진출력: 500마력

무장포드: 2ea

발사속도: M26 MLRS - 1분에 12발, ATACMS - 20초에 2발

최대사거리: M26 MLRS - 45Km, ATACMS - 300Km



2. M270 MLRS의 주요 탄두 (M26로켓②에이태킴스 미사일)

[*M270 MLRS의 컨테이너에 M26 로켓 장착시 12발을 사용하며, ATACMS 장착시 2발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M270 MLRS는 강한 화력뿐 아니라 높은 이동 속도(64Km)가 장점인데, 차량에 장착된 컨테이너의 미사일을 다 소진한 후 빠른 속도로 이동하여 2차 타격이 가능하기 때문에 북한 포병부대의 입장에는 타격 원점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재장전 시 미사일을 한 발씩 장착하는 것이 아니라 미사일 컨테이너를 통째로 장착하기 때문에 5분이면 2차 타격이 가능한 수준입니다.


▲사진 왼쪽(ATACMS), 오른쪽(M26 로켓)


M26 로켓(M26 MLRS)

사거리 45Km. 

644개의 M77 자탄을 탑재한 광역제압무기.

로켓포 1발 당 축구장 3개 면적을 초토화 가능.



M26 MLRS은 사정거리 최대 45Km로 수류탄 보다 폭발력이 큰 644개의 M77 자폭탄이 들어 있으며, 목표지점 상공에서 탄두가 분리되면서 목표물을 향해 살포됩니다. 이때 로켓 하나당 축구장 3배 면적을 초토화 시킬 수 있으며 북한의 155m 또는 203mm 야포 16문을 동시에 쏜 것과 같은 화력을 나타냅니다.




▼M26 MLRS 자탄의 모습





②가장 강한 화력 ATACMS 

사거리 165~300Km.

국군이 사용하는 ATACMS는 2 종류(블록 1,블록 1A)이며, M74 자탄을 950여 개를 탑재.

축구장 4개 면적의 적 병력과 장사정포, 경장갑 전력을 초토화할 수 있다.


▼ATACMS 미사일 자탄 분리과정


*에이태킴스(ATACMS) 미사일은 4가지 모델이 있으며, 국군이 사용하는 모델은 2종류로 블록 I는 M74 소형 폭탄 950개를 탑재하며, 블록 IA는 M74 자탄의 수를 300개로 줄여 사거리르 300km로 늘렸으며 GPS와 관성항법장치가 내장되어 보다 정확한 타격이 가능하기 때문에 북한 장사정포 부대가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국군의 전력입니다. 



M270 MLRS 다연장로켓 발사기는 북한의 비대칭 전력의 주축인 장사정포에 대응하기 위해 현재 대한민국의 안보를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으며, 한미 연합 감시자산에 의해 북한의 기습 또는 도발 징후가 있을 시 적의 전력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거나 일격에 박살 낼 수 있는 '지상 화력의 끝판왕'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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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은 한국 육군이 보유한 전차의 2배에 이르는 4,300대의 전차를 보유 중입니다. 수적으로 2배라는 개념은 전쟁에서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이미 국군이 보유한 최신 성능의 전차와 공격 헬기에는 괴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굳이 국군의 전차와 공격 헬기가 아니라도 기습하는 북한군의 전차부대를 최소 인원의 보병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 


탱크 1대를 한 명의 보병이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은 적의 주력인 전차 전력에는 큰 두려움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럼 한국 보병이 보유한 북한 전차와 1:1 맞짱에서 이기는 국군 대전차무기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실제 전쟁에서 대전차무기를 사용했던 보병이 적 전차부대를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 전례가 있습니다. 중동 전쟁에서 이집트군이 이스라엘 전차부대를 상대로 거둔 승리죠. 이처럼 최근의 대전차무기는 적 전차들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성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국군이 보유한 대전차무기의 종류는 대략 8종류 정도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용 시기가 오래되었거나 노후화된 기종인 M67 90mm 무반동총, M27 LAW, M40 106mm 무반동총은 오늘의 글에서 일단 예외를 시켰습니다. 


▼시계방향으로 M67 90mm 무반동총, M27 LAW, M40 106mm 무반동총


*M40 106mm 무반동총의 경우 3세대 전차를 상대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으며, 관통력은 압연강판 414mm 입니다.



1. BGM-71 TOW (토우 미사일)



토우 대전차미사일은 '탱크 킬러', '대전차 미사일의 베스트셀러'라는 별명으로 현재 40개국 이상의 나라에서 다양한 플랫폼으로 사용 중에 있습니다. 토우 미사일의 가장 큰 장점은 탱크 킬러라는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토우2A의 경우 관통력은 900mm입니다. 때문에 북한군이 보유한 거의 모든 전차를 박살 낼 수 있습니다. (3세대, 3.5세대 전차의 천적)



하지만 북한군의 신형 전차로 알려진 선군호의 추정 방호력이 700~900mm 정도되는 것과 추후 북한군 전차 장갑의 업그레이드를 감안할 때, 토우 미사일의 관통력이 통할지는 아직 미지수임을 알 수 있습니다.  

 


토우 미사일은 유선 유도방식이기 때문에 정지 상태에서는 명중률이 90%에 가깝고 이동 중에는 50%의 명중률을 자랑합니다. 또한 우리 군이 보유한 차량과 공격 헬기 등에 장착이 가능하고, 대당 1,090만 원이라는 저렴한 가격대는 큰 장점입니다. 다만 탄속이 느리고 유선 유도방식으로 사수의 위치가 발각될 확률이 높아 적의 집중포화를 받을 확률이 높은 점은 단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PZF-3 (팬저파우스트-3)



대전차 무기 강국인 독일에서 도입한 펜저파우스트-3는 북한의 T72 전차의 대량 보유설에 의해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 1995년부터 국군의 중대급 대전차무기로 도입한 화기입니다. 13kg이라는 초경량의 무게와 탄두 발사 시에 후폭풍이 발생하지 않는데 이는 탄두 중량과 동일한 중량물을 후방에 발사하는 방식(카운터매스)이기 때문에 참호 내에서도 사격이 가능합니다. 



현재 국군의 주력 대전차무기로 10,000여 기 정도 도입해서 운용 중이며, 최대 사거리 900mm에서 기본형 탄두만으로도 700mm 두께의 압연강판을 관통할 수 있기 때문에 북한의 최신형 전차를 제외하고 모든 전차를 박살 낼 수 있습니다. 



또한 신형 탠덤 탄두로 알려진 PzF 3-T를 사용했을 시에는 적 전차의 반응형 장갑을 파괴한 후, 800mm의 관통력이 나오는데 말 그대로 괴물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국군의 대전차무기입니다. 




3. 스파이크 NLOS



이스라엘산 대전차 미사일인 스파이크는 2010년 11월 북한의 연평도 포격 이후에 북한군의 해안포를 타격하기 위해서 도입한 국군의 대전차무기로 한 발당 2억 원에 이르는 높은 가격이지만 사거리가 25km에 이르며 높은 명중률을 자랑합니다. 




미사일 한 발 당 가격대가 K-9의 포탄 가격의 100배에 이르는 고가이지만 연평도 포격도발 이후 북한 해안포에서 유사한 도발이 있을 시에 5분 이내에 완전히 괴멸 시킨다는 목표로 국방부에서 도입하여 현재는 대전차용으로 운용하지 않고 적 해안포 섬멸용으로 해병대에서 운용하고 있습니다. 




4. Metis-M



M40 106mm 무반동총의 대체 병기로 운용 중에 있는 Metis-M은 러시아제 대전차무기로 사거리 1,500m에 이르며 관통력은 850mm 이상으로 토우와 재블린 미사일보다 성능이 우수한 것으로 알려진 만큼 국군은 현재 총 발사관 226문과 탄약 12,750발을 운용 중에 있습니다. 



보병이 운용하는 무기이기 때문에 무게가 관건인데 Metis-M의 무게는 불과 14kg에 불과하기 때문에 뛰어난 성능 외에도 운반이 용이해서 보병의 대전차무기로 손색이 없습니다. 특징으로는 토우 미사일처럼 반능동형의 유선 유도 방식을 사용하며, 탄약은 개당 2,500만 원으로 저렴합니다. 



▼K-200A1 장갑차 위에 탑재된 모습




5. 현궁



현궁은 현재 국군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대전차무기입니다. 앞서 설명드린 대전차무기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모두 갖춘 화기로 사거리는 2.5km로 900mm의 적 전차의 장갑을 단번에 파괴할 수 있는 대전차 미사일로 현재 북한군이 운용 중에 있는 모든 전차들을 박살 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막강한 관통력은 북한 신형 전차의 반응형 장갑을 관통하기 위해 일반 대전차 고폭탄과 다른 탠덤탄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탠덤(Tandem) 탄두

2개의 탄두가 직렬로 배치된 고폭탄으로 적 전차에 착탄 시, 전면의 소형 1차 탄두가 반응형 장갑을 무력화 시키고 그다음 2차 탄두가 전차를 관통하여 폭발합니다.



▲소형 전술차량에 탑재된 현궁


현궁의 가장 큰 장점은 Fire&Forget 방식과 Top Attack 기능이 있습니다. 토우와 Metis-M의 유선 유도 방식이 아닌 Fire&Forget 방식으로 적 전차를 향해 한 발을 발사한 후 즉시 자리를 이동해서 다음 목표물을 타격할 수 있어 다른 대전차무기와는 달리 사수의 생존력이 높으며, Top Attack 기능은 전차의 장갑이 가장 얇은 포탑 상부를 공략할 수 있어서 현궁의 타격 목표가 된 전차들은 100% 파괴가 되는 점입니다. 





<이미지-국방홍보원,국방부>


북한군의 구형 전차인 T-54/55, T-59 등 장갑 방호력이 350mm 이하인 전차는 국군이 보유 중인 대전차무기에 상대 자체가 안되며,  북한군의 주력 전차로 알려진 천마호(폭풍호)는 방호력이 600mm이기 때문에 PZF-3와 Metis-M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으며, 북한의 최신 전차인 선군호 역시 국군의 '토우 2A'와 '해궁'으로 모두 파괴시킬 수 있습니다. 다만, 국군도 점차 신형화되는 북한 전차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노후된 대전차무기들을 신형으로 교체함과 동시에 질적 향상과 보다 많은 대전차무기의 확보가 이루어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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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은 제2의 한국전쟁이라고도 합니다. 자본주의 체제인 남베트남과 소련과 중국에서 무기와 물자를 지원받은 공산주의 체제인 북베트남과의 전쟁이었는데, 결과는 공산주의 진영의 승리로 끝났지만 당시 세계 여러 나라의 군사전문가들과 전쟁에 참전했던 미군들 사이에서는 만약 한국군 단독으로 전쟁을 수행했더라면 분명 없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 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국군의 위엄이 대단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때 당시 북베트남의 지도자였던 호치민까지도 전장에서 한국군과 만나면 될 수 있으면 교전을 피하라고 지시할 정도였다고 하니 한국군의 위엄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럼 치열했던 전장에서 미국과 해외 언론에서 바라본 한국군의 위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군의 베트남전쟁 파병

존슨 미국 대통령의 한국군 파병을 요청한 이래로 처음 파병이 시작되었던 1964년 9월부터 한국군이 철수한 1973년까지 한국 최초 국군의 해외파병입니다. 



국군이 강했던 이유


한국군이 최신 장비로 무장한 미군과 프랑스군 등 함께 참전했던 국가의 군인들보다 전장에서 월등할 수 있었던 이유는 6.25를 겪은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을 경험한 뛰어난 지휘관들과 장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국 군인들은 베트남전쟁을 제2의 한국전쟁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공산주의 체제였던 북베트남군을 빨갱이라고 인식하고 어느 나라보다 열심히 싸웠습니다. 



베트남전쟁의 전설 '한국군의 위엄'



▼영국 런던 타임스에서 바라본 월남전의 한국군


만일 한국군이 전 월남을 장악하였거나 미군들이 "고보이" 교훈을 배울 수 있었더라면 월남전은 벌써 이겼을 것이다. 칠흙 같은 어둠 속을 96킬로나 자동차로 달려도 총격도 복병 기습의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월남 지역의 그 어느 곳에서도 그와 같이 할 자는 한국군 이외는 아무도 없다. 


-영국 런던 타임스에서-


* 고보이 교훈

맹호부대 포병대대가 퀴논 근처 고보이 평야에 건기에도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고보이 댐을 건설해서 열대지방인 베트남의 2모작 농사를 3모작이 가능하도록 만든 댐인데 당시 영국의 기자가 한국군이 대민지원을 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미국 저널지에서 바라본 월남전의 한국군


월남의 모든 사람을 다 제쳐놓고 60만 한국군에게 전쟁을 맡겨 보는 것이 어떨까? 5만에 불과한 한국군은 적의 구정 공세 기간 중 전술 책임구역 내에 침입한 적을 단 하루 만에 격퇴했다.. 베트콩의 항불전쟁 이래 베트콩에 장악되어 있던 중부 해안 지대가 지금은 한국군에 의하여 완전히 통제되고 있다. 


-1966.3 미국 에빈스빌 저널- 




▼67년 미국 옵져버지에서 바라본 월남전의 한국군


공산군이 38선을 넘어 남침할 당시 이 한국군은 지금의 월남군과 같았다. 그러나 17년이 지난 지금, 한국군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떠나, 철원의 고지를 떠나, 그리고 인천항, 부산항을 떠나 수천만리 이역땅에서 다시금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다. 


-미 옵져버지 1967.5.24-




▼미 뉴스위크지에서 바라본 월남전의 한국군


월남에 있는 미국인들은 전투에 있어서나 평정사업에 있어서나 한국군을 최고로 높이 평가한다. 사실 한국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해본 일부 미군들은 미군이 한국군의 전술을 배워도 좋으리라고 믿게 되었다. "마치 미국은 한국이라는 비범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 된 거와 같습니다. 어느날 아침 교실에 와서 선생인 미국보다 학생인 한국군이 앞서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과 같습니다."라고 한 미국 관리는 심각하게 말했다. 


-1967.4.10 뉴스 위크지-




▼뉴욕 타임지에서 발표한 '노획한 베트콩 지령문'


노획한 베트콩 문서에 의하면 베트콩은 100% 승리의 확신이 없는 한 한국군과의 교전을 무조건 피하도록 지시가 되어 있다. 한국군은 모두 태권도로 단련된 군대이니 비무장한 한국 군인에게도 함부로 덤비지 마라. 


-1966.7.22 뉴욕 타임지-




▼사이공 포스트에서 바라본 월남전의 한국군


한국군은 우군 피해에 대해서 15:1이라는 비율로 적을 사살했으며, 프랑스와 월남이 20년간 시도하다 실패한 빈딩성의 늪지 해안으로부터 적을 추격, 격파시켰다. 기본적인 한국인의 특성으로 지적할 만한 것은 불굴의 정신이다. 맹호, 백마, 청룡 용사들에 대하여 적이 조심하고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는 것이다. 노획한 베트콩이나 월맹군의 문서에 의하면 한국군과는 가급적 접전을 피하도록 전 병사들은 명령받고 있는 것이다. 


-사이공 포스트 1968.3.20-




▼미국 뉴스 앤드 월드리포트지에서 바라본 월남전의 한국군


미국은 한국이라는 귀한 동맹국을 찾아냈다. 그들은 건강한 투사, 그 이상이다. 싸우는 정치인들로서 한국인은 동양에서 월남인들과 가장 친근해졌을뿐더러 미국은 어떤 교훈을 한국으로부터 배울 수 있으리라 느끼게 되었다. 


-미국 뉴스 앤드 월드리포트 1967.5.15-




▼월남 띠엔 반지에서 바라본 월남전의 한국군


한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중부는 가장 안전한 곳이다. 한국군은 아주 특별한 전술을 가진 적에 대하여 방심하지 않고 경계를 하고 있는 대담한 군인이다. 또한 지방 농민들과 잘 어울리고 농사일에는 모도 심어주고 우수한 군의관은 대민 진료를 열심히 해주고 있다. 


-월남 띠엔 반지 1968.2.17-




▼리차드 닉슨이 바라본 월남전의 한국군


자유 월남의 장래를 위한 한국이 이룩해 온 커다란 공헌은 17년 전 미국이 한국에 심었던 신뢰와 협조가 헛되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명이 되고 있다. 


-리차드 닉슨 1967.12.17-




이외에도 한국군의 위엄을 인용한 내용


한국군을 만나면 무조건 피해라! 특히 맹호부대를 만나면 모든 작전을 취소하고 철수하여 병력과 장비 등 인민의 재산을 보존하라!


-호치민-


대체 한국군은 어찌 이리 용맹한가? 백마의 명사들은 자신의 목숨조차도 아깝지 않단 말인가? 나는 이것을 단순한 군인정신이라 인정할 수 없다!


-호치민-


12년간 수백만 발의 포탄을 쏘아대고, 수천 명의 전사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과 월남군, 미군에게마저 실패와 좌절을 안겨준 공산군의 요새를 한국 해병대가 단 두 시간만에 점령했다. 대체 우리 연합군에게 무엇이 문제였단 말인가? 


-르몽드-


한국군의 전술과 미군 전술과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한국군은 적으로부터 사격을 받으면 즉각 2개 내지 그 이상의 방향에서 공격을 가하여 베트콩이 도망칠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미군은 적으로부터 사격을 받으면 뒤로 물러나 포병지원을 요청하거나 공중폭격을 요청한다. 그다음에 공격을 하게 되니 적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만다. 


-미국 하원의 증언록에 실린 하원 국방위원장의 증언-




이처럼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은 전투에서는 최강의 용맹을 자랑했으며, 대민봉사 지원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는데, 당시 미군과 월남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월 한국군 사령관이었던 채명신 중장의 결정으로 이루진 신속하고 아낌없는 대민봉사 지원은 이후에는 연합군들이 벤치마킹을 할 정도로 뛰어났다고 합니다. 최근 북한군의 잦은 도발과 위협에서 우리 군은 다시 한 번 선배들의 정신을 되새기며, 막강한 군인으로 거듭나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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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김정남 암살사건 등 최근 그들이 보여준 막가파식 도발에 대해 한미 정부는 대북 정책을 전면 재검토하는 방안과 심지어 선제타격론까지 거론되고 있음을 여러 매체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미국 내에서도 이미 이러한 사실이 확인된 사안으로 3년 내 북한의 핵을 탑재한 미사일이 미국에 직접적인 위험이 될 수 있다고 판단을 하고 있으며, 미사일 도발 시 남은 방법은 선제타격뿐이라는 의식이 팽배합니다. 그리고 만약 북한이 한국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한다고 예상될 때 우리 군에 의한 독자적인 선제타격 능력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때입니다. 선제타격 시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미사일입니다. 오늘은 한국이 보유한 북한 선제타격이 가능한 미사일 체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북한 선제타격이 가능한 한국 대표 미사일>

탄도미사일 현무2, 순항미사일 현무3, 함대지 순항미사일 해성2, 잠대지 순항미사일 해성3, 공대지 미사일 SLAM-ER, 공대지 미사일 타우러스, 공대지 미사일 벙커버스터 GBU-28 등이 있습니다.



1. 탄도미사일 현무2 (A,B)


현무2 미사일은 사정거리 300km인 현무2A와 사정거리 500km인 현무2B로 구성되며, 현무2B의 경우 2007년에 개발에 착수하여 2009년 실전 배치된 우리 군의 최신 탄도 미사일입니다. 

북한 무수단리 미사일 기지를 5분 만에 타격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발사대 차량을 이용하기 때문에 북한군의 미사일에 대한 생존율이 높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특히, 목표지점 600~1500m 상공에서 950개로 분리된 자탄은 축구장 3~4개 넓이의 지역을 완전 초토화 시킬 수 있는 막강한 능력을 지닌 한국이 보유한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이 가능한 미사일입니다. 그리고 현무2는 미국에서 도입해서 운용 중인 '강철의 비'로 알려진 에이태킴스(ATACMS) 블록 1A보다 더 강한 것으로 알려진 우리 군의 최강의 탄도 미사일입니다. 





2. 순항미사일 현무3


한국판 토마호크로 알려진 현무3는 한때 평양의 김정은 집무실의 창문 가운데를 정확히 타격할 정도로 정확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북한 선제타격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우리 군이 보유한 최강의 순항미사일입니다. 또한 이동식 발사차량 외에도 해군의 이지스함, 잠수함에서도 발사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한 어느 지역에서 발사를 하더라도 북한 전역 타격 가능한 대한민국이 보유한 미사일 전력의 주축입니다.



현무3 순항미사일의 높은 정확도는 미사일 자체가 인공위성을 이용해 미리 입력된 지형과 지도를 대조해 가면서 비행을 하면서 궤도를 수정하면서 오차를 줄여나가면서 목표물을 찾아가서 타격하기 때문입니다. 





3. 함대지 순항미사일 해성2


북한의 3차 핵 실험에 대한 조치로 군에서 공개한 함대지 순항미사일 해성2는 해군의 구축함에서 발사하여 북한군의 지상 목표물을 타격할 수 있는 순수 우리 기술로 만든 최고의 함대지 순항미사일입니다. (사정거리 1000~1500km)

*세종대왕급 이지스함에는 32발의 순항미사일 해성2가 탑재되어 있습니다.


▼구축함에서 발사되는 함대지 순항미사일 해성2


단, 현재는 북한의 고정 목표물만 타격이 가능한데  북한의 이동식 발사대 미사일을 타격하기 위해서는 무인 정찰기를 비롯해 군용 통신 위성 등을 이용해서 이동식 발사대의 위치정보를 계속해서 감시해야 하기 때문에 이를 위한 완벽한 무장 능력을 보유하기 위해서는 육해공의 완벽한 첨단 네트워크 시스템이 하루빨리 갖추어져야겠습니다. 





4. 잠대지 순항미사일 해성3


함대지 미사일인 해성2와 함께 처음 공개되었던 해성3은 한국 해군의 잠수함에서 발사하기 때문에 대잠능력이 없는 북한에게는 치명적인 선제타격 수단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사정거리 500~1000km) 또한 긴 사정거리로 인해서 북한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까지 사정거리에 포함할 수 있는 한국의 대표 미사일입니다. 







5. 공대지 미사일 SLAM-ER


미국이 개발한 아음속 전천후 순항미사일입니다. 한국 공군에서는 북한군의 주요 군사지휘시설과 미사일 기지, 장사정포를 타격하기 위해서 미국으로부터 수입하여 현재 F-15K 전투기에 장착하고 있으며, 북한군의 도발이 예상될 시 신속한 선제타격이 가능한 미사일입니다. 



시속 734~1028km의 아음속 미사일로 미국의 하푼 미사일을 공대지용으로 개량한 미사일이며, 250km의 속도로 날아가 정지 또는 이동 중인 목표물을 타격할 수 있는 웃는 얼굴을 가진 막강한 미사일입니다.



F-15K에 SLAM - ER을 장착 중인 모습.





6. 공대지 미사일 타우러스


세계 최고의 공대지 미사일로 알려진 타우러스 미사일은 사거리 500km 이상을 자랑하며, 한국 공군의 F-15K에 장착되어 북한군 지휘부와 중요 군사시설을 타격하기 위해 지난해 12월부터 독일에서 순차적으로 170여기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또한 5월에는 타우러스 미사일의 실사격 훈련이 계획 중에 있어 북한의 도발에 대한 우리 군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타우러스 미사일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북한의 GPS 교란에 방해받지 않는 3중 항법 장치와 메피스토라고 알려진 '지능형 신관'을 사용해서 지하에 숨은 적을 찾아내 폭발을 일으키기 때문에 지하에 숨은 적 지휘부를 일격에 격퇴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어 북한 지휘부가 가장 무서워하는 미사일입니다.





7. 공대지 미사일 벙커버스터 GBU-28


현재 미국으로부터 200여 발을 도입해 공군의 F-15K에 장착하여 운용 중인 벙커버스터는 1991년 걸프전쟁 당시 미군이 개발하여 전세계에 알려진 대형 관통 폭탄입니다. 북한군의 지휘부와 주요 지하 시설물을 파괴하는데 최상의 성능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되는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이 가능한 미사일입니다. 




GBU-28은 공중에서 투하된 후 레이저에 의해서 유도되어 6m의 콘크리트를 뚫고 들어가 지하에 숨은 적을 일격에 격퇴합니다. 단, 사거리가 9km로 굉장히 짧기 때문에 가장 큰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적의 방공망을 완전히 무력화 시킨다음 벙커에 숨어있는 적과 시설들을 파괴하기에 적합한 미사일입니다. 

대당 가격은 1억 5,000만 원으로 대당 가격 20억 정도하는 타우러스와 비교됩니다. 





끝으로 현재 미국 정부는 한반도의 전술 핵무기 재배치와 북한의 선제타격 이외에도 새로운 대북정책으로 북한의 정권 교체까지 검토 중이라는 보고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당사국인 대한민국 역시 만일의 사태에 대한 철저하고 치밀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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