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육군 최강의 부대로 알려진 백골부대는 북한의 도발에 최초로 보복포격을 가한 북한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한민국 육군 부대로 알려졌습니다. 올해로 부대 창설 68주년을 맞는 백골부대는 대한민국 전군 유일의 DMZ 완전작전으로 명성이 높으며, 타 육군 메이커 부대에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패기와 용맹이 대단한 부대입니다. 




대한민국 육군 메이커 부대 중에서 역사와 전통, 자부심, 3박자를 모두 갖춘 백골부대, 제3 보병사단의 전설적인 일화들과 고 박정인 장군의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은 다가오는 호국보훈의 달에 북한의 기관총 도발에 100배로 갚아준 백골부대 박정인 장군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백골부대는 1973년 북한군의 기관총 도발에 포격으로 대응하여 북한군 GP를 완전히 초토화시킨 이후부터 북한군 전방 부대에게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입니다. (절대 과장이 아닙니다!)



1961년 박정인 장군이 전방 연대장으로 복무할 때의 일입니다. 당시에 군사분계선의 분위기는 북한군이 마음대로 들락거릴 정도로 아군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장면을 몇 번이나 직접 목격한 박정인 장군은 해당 중대장에게 "적이 군사분계선을 넘어오는데 왜 가만히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일선 중대장과 대대장의 대답이 정말 어이가 없었는데.. "북한군을 건드리면 보복하기 때문입니다."였고, 화가난 박정인 장군은 일갈을 날렸습니다.


"대대장의 총과 무기는 목숨을 걸고 조국의 땅을 지키라고 준 것이다."

"그게 대한민국이 당신을 무장시킨 유일한 이유다. 우리 지역에 침투하는 적은 즉각 사살하거나 포로로 하라."



이후 군기확립을 위해 박정인 장군은 '백골용사 선서문'을 제정하여 부대 행사나 장병 전출입 신고 시 큰 소리로 낭독하도록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백골용사 선서문>

1. 백전백승의 백골사단 용사임을 영광으로 삼는다.

2. 죽음을 무릎쓰고 명령에 복종하고 책임완수로 조국과 민족에 충성한다.

3. 모든 법규를 준수하고 전우를 사랑하며 모든 일은 '전투기준'으로 생활한다.

4. 훈련을 실전 삼아 일당백의 전기를 연마한다.

5. 화랑도 정신으로 실지를 회복하여 통일조국을 후손에게 물려준다.

6. 죽어서 백골이 돼도 조국의 수호신이 되어 민족사에 이름 석자의 명예를 남긴다.



이후 박정인 장군은 군사분계선을 수시로 넘어오는 북한군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부대내 특공 소대를 편성했는데,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북한군이 군사분계선을 또 넘어왔고, 사단 수색중대가 이에 대응사격을 하면서 양측이 교전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이때 편성된 특공 소대가 일시에 투입되어 대응을 하였고 부상을 입은 북한군 5명을 생포하기에 이릅니다. 



북한군 5명이 포로로 잡히자 북한군은 곧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추가 도발을 계획합니다. 이때 상황을 지켜보던 박정인 장군은 확성기를 들고 북한군을 향해 "올 테면 와라!, 전차로 증강한 1개 연대가 대기하고 있다."라고 외쳤습니다. 이후 박정인 장군의 강단에 전차로 증강했을 거라는 예상을 못했던 북한군은 겁에 질렸고, 포로가 된 북한군을 포기하고 그냥 돌아갔습니다^^



이후에 백골부대 사단장이 된 박정인 장군은 6.25 전쟁이 끝나고 사라진 '백골' 구호를 다시 부활시켰고, 총검술 훈련 중 부대원들이 남쪽을 향해 훈련하는 것을 보고 "왜 부모가 계신 남쪽을 향해 총검을 휘두르느냐, 김일성이 있는 평양을 향해 총검술 훈련을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또한 훈련장에 화장실 소변통이 남쪽으로 설치되어 있는 것을 모두 북쪽으로 바꾸는 등 이처럼 박정인 장군은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무장된 최고의 군인이었고, 그의 소신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군인이었습니다. 


1973년 3월 7일, 오후 1시 20분, 그가 백골부대 사단장으로 있을 때 긴급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철원 비무장지대에 표지판 보수작업을 마친 후 귀대하던 백골부대원을 향해 북한군이 기습 총격을 가했습니다."


이 도발 때문에 백골부대원 장교 1명이 사망하고, 부사관 1명이 중상을 입게 됩니다. 보통 이런 상황에는 상부에 상황을 보고하고 지시를 기다리지만...

보고를 받은 박정인 장군은 그 즉시 현장으로 출동하여 도발 중인 북한군들에게 사격 중지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북한군은 이를 거부하고, 백골부대 부상자를 포함한 소대 병력에게 계속 총격을 가했습니다. 


곧 박정인 장군은 이후 백골부대의 전설이 된 결단을 내립니다! <3.7 완전작전>



사단 내 포병대대를 총동원해 보복하기로 마음 먹고, 관측된 북한군 GP를 향해 105mm, 155mm 곡사포를 일제히 발사했습니다. 이때의 포격은 휴전 이후 한국군이 처음으로 북한 지역에 대규모 포격을 가한 사건이 되었고, 박정인 장군은 휴전 이후 최초로 북한군을 향해 포사격을 지시한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대규모 포격으로 놀란 북한군은 사격을 멈추고 일제히 도망쳤습니다. 그의 결단은 북한군에게 당한 아군을 구하고, 수시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도발하던 북한군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부대로 돌아온 박 장군은 부대원들에게 기습 총격을 가하고, 휴전협정을 먼저 어긴 북한군과 김일성에게 군사분계선을 지키는 백골부대의 무서움을 보여주기로 다짐합니다.



그날 사단 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군차량을 총동원하여 보란 듯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군사분계선 남방 한계선 바로 코 앞까지 돌진했습니다. 당시 이 상황이 얼마나 긴박했으면, 김일성은 즉시 전군에 비상동원령을 내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1975년 귀순한 북한군 유대윤 소위의 증언>

"당시 백골부대의 포사격으로 인민군 막사에 있던 북한군 36명이 사망했다. 지금도 북한군은 백골부대를 가장 겁내는 부대"라고 증언했습니다. 



박 장군의 회고록에는 당시 북한군이 단 한 발도 대응 포격하지 못한 것을 지적하며, "북한 공산당은 약자에게 강하고, 강한 자에겐 더없이 약하다."라며 북한이 도발할 때 강력한 응징이 따르면 북한군은 금방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발생한 후 10여 년이 지난 1985년 9월 20일, 함경남도 도민희 회장은 남북 이산가족 평양방문단의 자격으로 평양호텔에 투숙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북한 정치보위부 고위간부가 그를 찾아와 묻기를.. "함경남도 신흥군 출신의 박가 성을 가진 요란한 사단장 요즘 뭘 하오?"라고 물어보면서 증오에 찬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한군군에도 패기와 용기로 북한군의 도발에 즉각 대응을 할 수 있는 군인이 있다는 것을 북한은 그 때 알았을 것입니다.)


박정인 장군은 포격사건 이후로 한 달 만에 군복을 벗었는데, 그 당시 군의 작전명령권은 미군에 있었고, 상부에 보고 없이 북한군에게 공격을 지시한 책임이었습니다. 


2013년 7월 29일 박정인 장군의 인터뷰 내용에는 "괴뢰군은 몇 번이나 도발해도 그만인데 우리는 거기에 대응하면 정전협정 위반이라고 처벌하니 부대의 사기가 어떻게 되겠느냐?" 그래서 내가 본때를 보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사격을 하고 옷을 벗었다. 강하게 나가면 그들은 꼼짝 못한다. 적이 침범하면 즉각적으로 대응해 자기들의 책임 구역을 지켜야 한다. 국가가 준 무기를 가지고 국가가 준 부하들을 데리고 응징해야 한다. 그게 군인이다!




비록 이 사건으로 보직해임 전역을 하게 됐지만.. 그의 결단으로 이루어진 작전은 이후 전방에서 발생한 수없이 많은 북한군의 도발에 가장 성공적이고 모범적으로 대응했던 완전작전으로 전해지면, 대한민국 육군과 백골부대의 전설로 알려졌습니다. 



박정인 장군의 과감하고 즉각적인 대응으로 사건 이후 북한군은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북한의 전후방 사단이 통째로 교체되는 수모를 겪었고, 그 당시 북한 지휘관들이 거의 모두 교체되었으며, 백골부대를 상대하기 위해 3개 사단이 추가로 전방에 더 배치되는 등 북한은 자신들이 먼저 도발을 하고 오히려 전방 경계를 더욱 강화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백골부대의 위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북한이 백골부대를 이처럼 무서워하는 이유는?


1. 선전포고와 같은 강력한 구호! (미친개 몽둥이가 약! 약! 약!)



덤빌 테면 덤벼라! 끝장내겠다!라는 식의 강력한 구호는 실제 북한군이 언론을 통해서 당장 내리지 않으면 보복을 가하겠다고 나설 만큼 백골부대의 패기를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2. 기관총 도발에 즉시 포격으로 100배 대응!



북한군의 기습도발에 의해 아군 사상자가 발생하자, 즉시 현장으로 출동해 일단 사격 중지 요청을 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즉시, 도발 원점 확인과 함께 사단 포병대대를 총동원해 북한군의 도발 원점에 포격을 가해 북한군 소대를 전멸시킨 점입니다.


3. 괜히 침투했다가 일망타진 된 무장공비



1992년 5월 22일 국군 군복 차림으로 위장한 무장공비 3명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곧 백골부대 수색대와 정찰부대에 의해 순식간에 일망타진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5.22 완전작전으로 월남전을 제외한 국군의 작전에서 최초의 을지무공훈장 군인을 배출한 작전으로도 유명합니다. 


4. 북한 도발에 대응 우수부대 (7.16 완전작전)


1997년 7월 16일, 또 한 번 북한군이 군사분계선을 넘는 도발을 하는데, 3.7 완전작전에서 박정인 장군이 사단장으로 있을 때 대패했던 부대 소속의 북한군 14명이 중동부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오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당시 23분이라는 시간동안 국군과 북한군 사이에서 300여 발의 소총과 포사격에 의한 교전이 발생했는데, 아군은 한 명의 피해도 없이 북한군 3명 사망, 2명이 중상을 입는 등 양측 교전에서 대승을 이룹니다. 


이 사건은 3.7 완전작전 이후 북한군의 같은 부대가 또 한 번 백골부대에 참패하자 북한군 해당 부대의 간부들이 모두 숙청당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는 이후 귀순한 북한군 장교의 증언에 의해서 밝혀졌습니다


5. 도발을 해도 백골부대만은 피하자!



백골부대에 의해 여러번 대패한 북한군은 1997년 7.16 완전작전 이후 2001년 군사분계선 월경 사건 1회를 제외하면 백골부대가 주둔한 철원 일대는 단 한 번도 도발한 일이 없습니다. 이는 북한군 사이에서도 백골부대는 일부러 피해서 도발한다는 것을 그동안의 파주나 연천 일대의 사건들을 보면 일부러 백골부대가 주둔한 곳은 피하는 듯한 모습을 확실히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처럼 박정인 장군의 군인정신은 지금도 백골부대의 전통으로 그대로 남아 국군 최고의 메이커 부대이자, 북한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국군 부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치며.. 2015년 8월 4일 DMZ 목함지뢰 매설 사건은 북한군이 DMZ를 침범, 목함지뢰를 설치하여 국군이 피해를 입었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DMZ의 국군의 작전 개념은 '저지'에서 '격멸'로 전환되었습니다. 남북 군사 충돌은 분명 큰 피해를 가져옵니다. 전쟁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되지만, 그들의 도발로 국군과 민간인의 피해가 발생한다면 결코 당하기만 하는 일은 앞으로 없어야 하겠습니다. 



"북한군이 기관총을 쏘면 우리는 대포로 적을 응징하는 것이 군인의 임무다."

-백골부대 전설 고 박정인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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