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릴열도의 남부에 위치한 4개 섬은 오래전부터 러시아와 일본의 영토분쟁이 계속되고 있는 지역입니다. 두 나라가 지금까지도 분쟁을 지속하고 있는 이유는 이 지역이 풍부한 지하자원과 함께 전략적 가치가 높기 때문이죠. 이곳은 2차 대전 이후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지만 현재 일본은 계속해서 러시아에 반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2008년 일본의 극우세력은 쿠릴열도의 4개 섬뿐만이 아니라 러시아의 사할린 일부 지역까지 일본의 영토라고 우기며 강경하게 반환을 요구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결국 일본의 이러한 막가파식 반환 요구에 화가 난 러시아는 일본에 대해 강력한 군사 대응을 결심하는데,, 지금부터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쿠릴열도' (일본명: 북방영토)

러시아 동부의 사할린주에 속한 열도이며, 태평양 북서부 캄차카반도와 일본의 훗카이도 사이의 1,300km에 걸쳐 있는 56개의 섬과 바위로 이루어진 지역입니다. 현재는 러시아 국민이 3만 여명 정도 살고 있으며, 군사시설을 보유한 채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다.


쿠릴열도 4개 섬의 역사적 배경


러시아와 일본의 쿠릴열도를 둘러싼 영유권은 1855년 이후 100여 년간 4차례나 바뀐 역사가 있습니다. 특히,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쿠릴 열도와 남 사할린 지역까지 일본이 점유하였는데, 이후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해 쿠릴열도와 사할린 섬 전체는 러시아가 점유하게 됩니다. 

(샌프란시스콘 강화조약은 일본의 쿠릴열도 권리를 완전히 포기한 일본과 연합군 간의 평화조약)


하지만 일본은 지속적으로 남 쿠릴열도는 쿠릴열도에 속하지 않으며 일본의 영토라는 주장합니다.




일본 극우파의 망언과 러시아 전략폭격기의 출현


쿠릴열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영토분쟁이 한창일 때, 일본은 연일 쿠릴열도의 영유권이 일본에 있음을 알리면서 러시아의 심기를 건들기 시작합니다. 러시아 역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근거하여 일본의 주장에 반박하는데, 이때 큰 사건이 터지고 맙니다. 

바로 일본 극우세력의 망언이 폭발하게 되는데, 그 내용이 쿠릴열도 4개 섬뿐만이 아니라 러시아의 사할린 일부 지역까지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러시아를 비방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런 일을 가만히 참고 있을 러시아가 아니죠. 


▼러시아 전략폭격기 Tu-95


2008년 2월 오전 7시 30분,


도쿄에서 남쪽으로 650km 떨어진 북태평양 이즈 제도 상공에 러시아 공군 소속의 Tu-95 전략폭격기 4대가 나타나는데, Tu-95는 핵투발이 가능한 러시아의 핵전략폭격기였습니다. 당연히 일본이 경악할 수밖에 없는 일이 터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Tu-95는 15,000km를 날아가 150,000kg의 폭탄을 투하할 수 있는 막강한 능력을 지닌 전략폭격기입니다. 그리고 현역 핵무기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핵무기로 알려진 차르봄바를 투하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그야말로 초비상이 걸리는 상태였습니다. 


'차르봄바'

핵폭탄의 제왕으로 불리며, 러시아에서 개발한 현존하는 폭탄 중에서 가장 강력한 폭탄입니다. 




일본은 이미 핵폭탄을 경험한 나라이기 때문에 전 국민이 폭격기에 대한 트라우마가 상당했고, 당시 Tu-95는 분쟁 지역인 북 훗카이도 인근이 아니라 도쿄에 인접한 곳으로 날아와 비행했기 때문에 민간인들뿐만이 아니라 군에서도 놀랄 수밖에 없었죠.

결국 일본 전투기와 공중조기경보기까지 합해서 총 24대의 전력이 긴급 출동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러시아 폭격기 Tu-95의 비행경로


이렇게 한 차례 일본 열도에 비상을 걸어준 러시아 전폭기는 도쿄 부근을 근접 비행한 후, 유유히 북쪽으로 사라졌습니다.



3년 후, 또 한 번의 망언과 러시아의 보복 


2011년과 2012년은 러시아와 일본의 쿠릴열도를 둘러싼 분쟁이 격화되는 시기인데, 2010년 11월 러시아의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쿠릴열도의 쿠나시르를 방문했었는데 이를 두고 당시 나오토 일본 총리는 2011년 2월에 '러시아의 용인할 수 없는 폭거'라는 발언과 함께 강도 높은 비난을 하게 됩니다. 


▼Tu-95의 일본열도 비행경로

결국 러시아는 일본의 망언에 다시 한 번 군사적 대응을 하게 되는데.. 

2011년 9월 8일, 다시 한 번 Tu-95를 일본 영공에 띄웁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공중급유까지 해가면서 일본 열도에 최대한 근접해서 전략폭격기가 한 바퀴 선회하는 상황을 만들어버립니다. 

일본으로서는 정말 치욕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이죠.



그리고 최근에 러시아 국방위원회는 쿠릴열도 내에 새로운 사단 병력을 배치할 것임을 밝혔고, 일본 관방장관은 정례 브리핑을 통해 유감을 표명했는데, 이렇게 쿠릴열도는 풍부한 자원과 그 지역이 갖는 전략적 가치 때문에 영유권 분쟁이 계속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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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내전은 1963년 쿠데타로 집권한 알 아사드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평화적 시위에서 정부군과 반군의 전쟁으로 확대되어 지금까지 민간인을 포함해 수많은 사상자와 난민을 발생시켰습니다. 그리고 정부군과 반군을 지원해주는 주변국들에 의해 대리전의 모습으로 변하면서 내전은 장기화되었고, 이런 영향을 받아 정부군과 반군에는 다양한 무기들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반군들의 무기가 언론에 노출되면서 많은 관심을 받았었는데 정부군에 대항하기 위해서 반군들이 직접 만든 놀라운 수제 무기들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시리아 내전을 지원하는 주변국

정부군 지원: 러시아, 이란

반군 지원: 미국, 서방 국가, 사우디아라비아 


▼ 스마트폰의 나침반을 이용해서 만든 수제 미사일로 대공 목표물을 향해 공격을 준비하는 반군 (마흐무드 하산 로이터)

스마트폰, 게임기의 조이스틱 등을 이용해서 직접 무기를 제작합니다.



▼알레포에서 시리아 반군이 직접 만든 로켓을 발사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에드워드 엘리아스 AFP)

임의로 제작한 발사대와 탄두에 로켓 날개를 용접해 만든 미사일입니다. 

탄두의 화약은 전장에서 습득한 각종 포탄과 총탄의 화약류로 만들어집니다. 



▼실내에서 박격포 포탄을 직접 제작하고 있는 반군 (하미드 카팁 로이터)

흔히 철강 공장에서 볼 수 있는 장비들을 이용해서 박격포와 다양한 무기들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직접 제작한 폭탄을 거대한 새총을 이용해서 투척하는 모습(Asmaa 로이터)

반군이 직접 제작한 거대한 새총을 사용해 수제 폭탄을 투척하는데 멀리서 사용이 가능하며 폭탄을 발사할 때 소리가 나지 않아서 정부군에게 들키지 않고 반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원통의 철을 두 개를 붙여서 만든 수류탄 (칼릴 애쉬 위 로이터)

직접 만든 수제 폭탄입니다. 정부군에 대항하기 위해서 은폐했다가 직접 투척하거나 새총을 이용해서 공격하는데 파괴력이 일반 수류탄보다 더 강하다고 합니다. 



▼즉석으로 만든 장갑차 (에르베 바 AFP)

외부에서 각종 철판을 수거해서 용접으로 차량 전체를 덮어 정부군의 총탄으로부터 보호하면서 특정 지역을 수색하거나 이동할 때 주로 이용하는 반군의 장갑차량입니다. 



▼수제 수류탄을 산탄총에 부착해서 발사 준비 중인 반군 (고란 Tomasevic 로이터)

산탄총을 이용해서 직접 제작한 수류탄의 심지에 불을 붙이고 있는 모습인데 반군은 보병전투에서 직접 제작한 수류탄을 직접 투척하거나 산탄총을 이용해서 더 먼 지역을 향해 공격하는 용도로 사용합니다. 



▼반군의 화염병 (피에르 토레스 AFP)

화염병은 대전차 무기로 처음 등장한 이후로 전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용 중인 무기입니다. 

제작이 간단하고 쉬운데 유리 병에 휘발유 등을 넣은 후 불을 붙여서 사용하죠. 

시리아 반군에서도 화염병은 자주 사용되는 무기입니다. 



▼트럭 화물칸에 고사포를 장착한 대공무기 (라 에드 알 로이터)

이동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트럭 짐칸에 대공 무기를 장착한 후 정부군의 전투기를 향해 있는 모습입니다. 

반군이 보유한 무기 중에서도 강력한 화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대한 수제 폭탄을 발사하기 위해서 준비 중인 반군 (로이터)

시리아 대통령인 알 아사드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들리브 마을을 타격하기 위해 거대한 수제 폭탄을 준비하고 있는 반군의 모습입니다. 



▼휴대용 로켓 발사기 (Tausif 무스타파 AFP)

철근을 용접으로 이어 붙여서 휴대용 발사대를 만들고 직접 제작한 미사일을 장착한 모습입니다. 무기가 열악한 반군은 탄두에 화약을 주입하는 역할은 일반 동료가 작업을 하고 용접과 직접적인 제작은 기술자들을 이용해서 파괴력이 있는 무기들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포구가 2개인 반군의 박격포 (Tausif 무스타파 AFP)

수제 박격포를 이용해서 인접한 지역의 정부군을 향해서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반군의 모습입니다. 



▼급조 폭발 장치를 운반 중인 반군 (나르시 콘트레라스 AP)

알레포 디드 지역에서 정부군의 탱크와 반군이 싸우고 있는 동안 급조 폭발 장치를 운반하고 있는 반군의 모습입니다. 



▼알레포 인근에서 반군이 제작한 대량의 미사일 (에드워드 엘리아스 AFP)

정부군고 싸우기 위해 반군의 비밀 시설에서 만든 미사일의 모습입니다. 만일 이 시설물의 위치가 노출된다면 반군으로서는 큰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을 거 같습니다. 



▼반군이 저격수를 피해 더미 헤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란 Tomasevic 로이터) 

정부군과 반군의 전투가 치열한 곳에서 정부군의 저격수는 항상 반군을 노리고 있습니다. 

정부군 저격수의 위치를 알아보기 위해 반군 병사가 더미 헤드를 이용하는 모습인데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네요.

 


▼로켓을 만드는 일을 하는 반군 (에드워드 엘리아스 AFP)

정부군의 포격이 사라지면 반군은 거리로 나가 하루에 50여 개에 이르는 불발탄을 수집합니다. 이렇게 수집된 불발탄을 분해해서 자신들이 미리 만들어 놓은 무기에 적합하게 다시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급조 폭발물을 제조 중인 반군 (문 타하 로이터)

급조 폭발물은 저가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발휘하는 무기입니다. 정부군의 탱크와 장갑차의 진입이 예상되는 곳에 설치하기 위해서 두 사람이 급조 폭발물을 만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치열했던 알레포의 어느 도로에서 무서워 몸을 웅크리고 숨어있는 어린아이의 모습.


시리아 내전의 최대 격전지였던 알레포에서는 하루에도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전쟁의 참혹함은 어떤 이유에서든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어린이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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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소련 붕괴로 혼란스러웠던 러시아를 '강력한 국가권력 확립과 경제 재건'이라는 슬로건으로 국내 정치 안정과 경제 활성화를 이룩하는 등 경제 성장과 함께 대외적으로 러시아의 위상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이면에는 그는 강력한 체제 유지를 위해 여론을 통제하고 자신의 체제에 반대하는 정적을 제거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오늘은 그가 10여 년 전 자신의 정적들에게 보낸 일종의 경고 메시지였던 러시아의 암살용 음식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블라디미르 브라디미로비치 푸틴

1952년 10월 7일, 러시아 출생으로 2012. 5월부터 러시아의 제6대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으며, 2008년 타임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대통령 당선 이후 러시아 국민들에게는 강력한 러시아를 만드는 강력한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남자?


푸틴의 인기 비결은 크게 경제 회복, 강대국으로의 부활, 카리스마 등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소련 붕괴 후 위기에 빠졌던 경제를 회복시켜 집권 후 GDP 1조 달러를 증가시켰고, 소련 붕괴 후 미국에 패배의식을 갖고 있던 러시아를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부활시키면서 국민들의 강대국에 대한 꿈을 실현시켰으며, 저돌적인 추진력과 카리스마는 그를 한때 일부 반(反)푸틴 정서가 강한 지식인들을 제외하고 러시아에서 지지율 90%에 이르는 대통령으로 만들었습니다. 



그의 카리스마는 KGB 경력에서 나온다  


소련 붕괴 이전까지 KGB(국가 보안위원회)는 냉전시대에 미국의 중앙 정보국(CIA)와 우열을 다툰 조직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푸틴 역시 KGB 요원으로 활동을 했었는데 그가 어떤 활동을 했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는 거의 없지만,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찍힌 사진을 통해서 해외 KGB 요원으로 활동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자신이 동독 지역의 KGB 스파이로 활동하면서 서방의 산업 기술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했었다고 직접 밝히기도 했었죠.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찍힌 푸틴


그의 예전 경력 때문인지 최근 러시아 언론에 의하면 푸틴 대통령이 2018년 대선에 앞서 계획하고 있는 국가 안보 개혁이라는 소련의 KGB와 비슷한 기관인 MGB를 설립했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MGB는 사실상 KGB의 부활을 뜻하며 그의 정적과 비판 세력에 대한 강력한 탄압을 하기 위한 기관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런 부분만 살펴봐도 KGB 요원 출신으로서 그의 기질을 확인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자신을 비판하는 세력과 정적들의 결말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 등 미국의 대표 언론들은 지난 러시아 총선에서 푸틴 대통령의 집권 여당이 압승을 거둔 결과에 대해서 꼬집었는데 그는 정적들을 감옥에 보내거나 해외로 추방하며 심하게는 러시아 야권 지도자였던 보리스 넴초프처럼 살해당할 수도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었죠. 


결국 야당은 오랜 세월 동안 소수 야당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고, 선거 기간 동안은 TV에도 출현하지 못했으며, 야당 지지자들은 조직적으로 방해를 받아왔었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죽음을 맞은 푸틴의 정적들



물론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적들이 죽음을 맞은 것에 대해서 그가 배후였다는 것을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러 정황들을 살펴볼 때 그의 정적들의 죽음은 의심스러운 부분들이 많다는 것이죠. 특히 방사능 물질에 의한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의 독살 사건은 그가 정적들에게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라는 설이 있습니다.



푸틴 대통령의 정적들에 대한 경고 메시지, 방사능 홍차


러시아 KGB의 후신인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출신인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는 자신이 소속되어 있던 곳의 당시 국장이었던 푸틴이 명령한 암살 명령과 1999년 300명이 숨진 모스크바의 아파트 폭발 테러가 FSB의 자작극이라고 폭로하는 등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만큼의 푸틴 정권의 비리와 부당함을 전세계에 폭로하고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이후 그는 영국으로 망명하여 더욱 거세게 푸틴 정권을 비판하죠.



'푸틴을 건드리면 방사능 홍차를 마시게 된다'라는 인터넷 유머까지 유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2006년 11월 리트비넨코는 FSB 옛 동료인 안드레이 루고보이와 KGB 출신인 드미트리 곱툰을 만났는데 이들과 헤어지고 난 후 복통을 호소하여 병원에 입원을 했고, 3주 후 그는 병원에서 사망합니다. 의문사했던 그를 부검한 영국 의사들은 하나같이 놀라고 마는데..

그의 몸에서 검출된 방사능 물질, 폴로늄 210. 


▼사고 경위, 출처-조선일보


폴로늄 210은 일반 사람이 구할 수 없는 물질입니다. 

1000만 분의 1그램이 유입되면 폐암이 발병하고, 100분의 1그램이 유입되면 2주 이내에 사망하게 이르는데, 자연에서는 존재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고 굳이 만들려면 양성자 가속기를 통해서 만들어지는데 1년 동안 만들 수 있는 양이 고작 100g 정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 추적 끝에 방사능 물질은 리트비넨코가 옛 동료와 만났을 때 마셨던 홍차에서 검출되었고, 그가 만났던 동료 중 한 명인 루고보이가 런던에서 머물렀던 호텔 3곳과 비행기 두 대에서도 검출됩니다. 하지만 그는 이후 폴로늄 210에 대한 답변을 일절 거부했었죠. 


이렇게 만들기 힘들고 구하기 힘든 물질을 왜 암살무기로 이용했을까요? 

대상자가 죽은 뒤에도 검출될 것이 뻔한 물질인데..



답은 간단합니다.


그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세력들에게 푸틴 대통령이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죠. 폴로늄 210이라는 방사능 물질을 이용해서 러시아가 개입했다는 것을 일부러 알려준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당시 영국 경찰의 조사 결과는 리트비넨코가 만난 동료 2명을 살해범으로 지목했으며 러시아가 개입한 것이 분명하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영국의 엉터리 수사라고 오히려 공개적으로 영국을 비난합니다. 


결국 이렇게 사건이 마무리되는가 했는데..



이후 10여 년의 시간이 지난 뒤, 2016년에 영국 정부의 리트비넨코 암살 진상조사 위원회는 이 사건이 푸틴의 최종 승인하에 이루어진 암살 사건이라고 공식 결론을 내렸으며 수사를 종결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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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44년 전, 미국의 캘리포니아주 엘 토로에 위치한 미 해병대 비행장에는 잔디밭 위에서 아주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는 계란 모형의 물체가 목격됩니다. 이 비행체의 이름은 '개렛 스탬프'라는 초소형 VTOL기(수직이착륙기)인데, 미 해병대에서 전장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개발된 전술 비행기입니다. 




당시 미 해병대에는 해안 방어선 정찰이나 도하 임무 등 비전투 임무에 적합한 전술 비행기가 필요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STAMP 프로그램(소형 전술비행 플랫폼)은 에어리서치 메뉴팩쳐링이라는 회사에서 개발을 맡았었고 거의 확정이 되는 듯했습니다. 

2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시속 120km의 속도로 비행이 가능한 정말 획기적인 비행체로 소개되었었죠. 



당시 천조국 해병대에서는 이 비행체를 욕심낼 수밖에 없었는데 영국 공군의 해리어기처럼 노즐의 추력만을 이용해서 이착륙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미 해병대가 추구했던 전술기와 거의 일치하는 듯했었죠. 물론 해리어기처럼 날개가 달려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진에서 보듯이 균형이라는 단어와는 전혀 상관없을 거처럼 생긴 외형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기술 없이 엔진의 추력만으로 비행과 이동이 가능했었는데, 이점은 기존의 VTOL기보다 오히려 비행능력이나 조정 능력이 더 뛰어났습니다. 


▼Harrier



중량은 122kg 밖에 나가지 않았는데, 개렛 TSE-231 개스터빈은 비행체를 공중에 띄워주는 데는 충분한 최대 1,050파운드까지 추력을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에 탑승자 2명과 연료를 싣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이 부분이 역시 가장 큰 장점이기도 했었죠.



이렇게 만들어진 프로토타입은 몇 번의 테스트를 거치면서 미 해병대가 원하는 모든 부분에 만족했습니다. 비행 가능 시간이 30분 정도 되었는데 이착륙을 한 번만 하면 최대 48km를 비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해양에서 함선 간의 연락이나 해안 방어선 정찰 등의 임무에 최적화된 비행체였습니다. 



하지만 미 해병대의 마음에 쏙 들었던 개렛 스탬프에게도 큰 단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고가의 전용 개스터빈 엔진을 사용한다는 것이었죠. 이 엔진을 이용한 1대의 제작 비용이 무려 50만 달러에 이르렀습니다. 당연히 예산이 부족했던 미 해병대는 자연스럽게 STAMP 프로그램의 경쟁 후보였던 월리엄스 인터내셔널사의 X-Jet에 관심을 보이게 되고 비록 성능 면에서는 개렛 스탬프보다 조금 부족했지만 X-JET의 손을 들어주게 됩니다. 


이렇게 결국, 천조국 해병대가 욕심냈던 계란 모형의 전술비행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아래는 미 해병대의 STAMP 프로그램에 선정된 X-JET, 그리고 유사한 VTOL기 모음입니다. 


▼Williams사의 X-Jet


월리엄스 인터내셔럴사의 1인승 VTOL기 X-JET


실제로 저런 모습의 비행체가 공중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공중에서 45분동안 작전을 수행할 수 있으며, 최고속도 96km라고 알려졌습니다. 



▼현재 미 공군 명예의 저당에 전시된 모습


이외의 VTOL 전술 비행기


▼힐러 VZ-1 포니


1953년 Hiller Aircraft Corporation의 해군 연구청 (Office of Naval Research)에 의해 1955년에 개발이 완료된 1인승 VTOL기입니다. 


▼후기 버전



비록 이러한 VTOL기가 실전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민간 또는 군에서는 많은 관심을 보였던 기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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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오래전부터 끊임없이 독도 영유권에 대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왔습니다. 최근 2월 14일, 일본의 아베 정권은 독도 영유권에 대한 교육을 의무화하는 학습지도요령을 고시했었죠. 이렇게 일본은 우리가 조금만 틈을 보이면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어 국제사회에서 유리하게 이끌어 가려고 합니다. 이런 그들이 독도 침탈 야욕을 세상에 공개한 일이 있었는데, 바로 '독도점령 시나리오'입니다. 오늘은  2008년 전 일본 육상자위대 교관인 다카이 사부로가 공개했던 '독도점령 시나리오'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독도점령 시나리오'란

2008년 일본 우익 정치학자 나카무라 아키라 도쿄대 명예교수가 '다케시마 폭격론' 발표했으며, 이후 육상자위대 간부 다카이 사부로가 '다케시마 강습작전 시나리오'를 발표하여 당시 일본의 극우 세력을 중심으로 여론이 형성된 사건입니다. 



당시 '독도점령 시나리오'가 발표된 시기에는 일본은 법적, 군사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었죠. 하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일본은 자위대 법률을 개정해서 외부의 간접 침략까지 무력행사를 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함으로써 분쟁지역에 군사력을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럼 지금부터 그 당시 육상자위대 간부가 밝힌 '독도점령 시나리오'에 대해서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F-2A 전투기 

(독도분쟁 시 우선적으로 투입될 전투기로 예상합니다.)


'독도점령 시나리오'의 시작은 항공자위대의 주력 전투기와 전자전기로 시작


일본의 시나리오는 F-2A 전투기 4대와 F-15J 전투기 40대, 전자전기 4대로 구성된 전력으로 기습적으로 공습에 나서고, 해상에서는 호위함 5척 정도가 127mm 함포로 초기 기습공격에 가담한다는 전략입니다.


▼F-15J 전투기


<작전설명>

F-2A 전투기 3대는 JDAM 폭탄을 탑재(각 4발 탑재) 하고 독도의 접안시설을 12발의 JDAM 폭탄으로 파괴, 나머지 1대는 독도 군시설의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이후 40대의 F-15J 전투기는 출동한 한국의 F-15K 전투기와 공중전을 벌이고, 동시에 함께 출격한 4대의 전자전기는 공군과 한국군의 레이더를 무력화 시키는 것과 동시에 F-2A, F-15J 전투기가 우월하게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잠수함을 이용한 특수작전부대의 상륙


이렇게 일본은 전투기를 이용한 공격으로 독도의 군시설을 파괴한 후, 잠수함을 이용해서 특수작전부대를 신속하게 침투시킵니다. 이후 특수작전부대가 잠수함을 통해서 독도에 상륙한 후 점령 작전을 수행하면, 전투기와 호위함, 전자전기, 잠수함 등을 독도 주변 해역에 배치하여 한국군의 반격에 대비해 초계임무에 들어갑니다. 




일본 해상자위대의 잠수함 전력은 연습함을 제외한 야시오급 디젤 잠수함 11척과 소류급 AIP 탑재 잠수함 8척을 보유하고 있으며, 동아시아 최강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지금도 잠수함과 이지스함 등 추가적인 전력을 더욱 키워나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상륙훈련 중인 자위대 특수작전부대



한국 육해공 전력의 대응


만일 이처럼 일본의 '독도점령 시나리오'가 실제로 실행되었을 때, 그는 한국의 육해공 전력이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서도 3가지 가능성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독도 탈환작전에 나서지 않고 독도를 포기한다. 

둘째는 특수부대와 해,공군의 지원으로 독도 탈환작전을 실시한다. 

셋째는 한국 해병대의 쓰시마 점령.


이미지-국방홍보원


위에 언급한 3가지 가능성에 대해 한국의 독도 탈환 대신 쓰시마를 점령할 가능성에 무게를 두면서, 이후 한국 전력이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서 자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살펴보면, 

1. 한국은 대규모 해군, 해병대, 공군 전력을 총동원해 쓰시마를 기습 점령한다.

2. 일본 자위대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주요 거점을 점령한다.



이렇게 일본은 오랜 시간 동안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단지 생떼를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법적, 군사적,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서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다카이 사부로는 '독도점령 시나리오' 마지막 부분에 이 기습작전의 성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일본 정부의 정치적 결단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가능하다고 하면서 정치권의 결정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거침없는 독도 침탈 야욕과 도발행위에 대해서 우리 정부는 국민들의 반일 감정에만 기대하지 말고, 강도 높은 대응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독도는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자존심이며, 모두가 함께 지켜나가야 하는 대한민국 영토주권 최후의 보루이자 상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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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는 수없이 많은 무인들이 존재했습니다. 그중에서는 한가지 무기 또는 여러 다양한 무기로 당대 최고의 무인에 자리에 오르는가 하면 몇 세기 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뛰어난 무예와 발자취를 남긴 영웅들도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조선의 검신으로 알려진 왜검을 배워 왜검을 베려 했던 검신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오늘은 한국과 일본의 대표 3대 검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미지 - SBS드라마



한국, 일본 역사에는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졌거나 또는 알려지지 않은 뛰어난 검객들이 많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한국 VS 일본, 3명씩 선택했답니다^^ (더 뛰어난 검객들이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이미지와 내용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한국의 검신


사진- SBS 육룡이나르샤


고려의 여포, 무쌍액션의 검신 척준경 

(일본 검신과 1:3 대결도 문제없다?)


한국사 최고의 용장이자 검신이라 알려진 척.준.경. 

이미 드라마나 게임 등으로 많이 알려져 거의 모르는 분들이 없을 거 같습니다. 척준경은 모든 전투에서 역발산기개세의 용장으로 자신의 용역만으로도 가히 전세를 뒤집을 만큼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역사에서 그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고려 VS 여진 전쟁에서 여진족이 정주성을 공격했을 때인데, 그는 사령관에게 말 한 필과 무기를 요구한 뒤, 적진에 단신으로 뛰어들어 적장 2명의 목을 베고 소풍 다녀온 듯 유유히 귀환합니다. 여기서부터 그의 전설이 시작되죠.


이후에도 그는 도저히 인간계에서는 볼 수 없는 많은 공을 세웁니다. 

윤관을 따라 여진족 정벌에 나서서 역시 단신으로 칼과 방패만을 지닌 채, 성벽을 올라가 성안의 여진족들을 썰어버립니다. 이때 기세를 받은 고려군은 쉽게 성을 함락했었죠. (이미 신선계의 경지에 도달함)


* 그의 무용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장수들처럼 소설이 아니라 실제 '고려사', '고려사절요'에 실려 있는 실존 인물이라는 거죠.





일본 검술을 배워 일본을 베려 했던 검신, 김체건


조선의 군사들은 활과 칼을 지니고 있어도 전투에서 일본 무사들이 왜검을 들고 달려들면 기세에 눌리거나, 왜검법에 쉽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했던 당시 훈련도감의 군교였던 김체건은 왜관에 숨어들어 3년의 시간 동안 일본의 왜검을 익힙니다.(왜검으로 검신의 경지에 오름)



숙종 앞에서 땅에 재를 뿌려두고 검술 시범을 보였는데 재에 발자국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그의 무예가 뛰어났다고 합니다. 그는 이후 조선의 군병들에게 일본의 왜검을 전수했는데(그가 배워온 왜검은 '무예도보통지'에 글과 그림으로 설명됨), 그의 아들 김광택 역시 조선의 검신으로 알려질만큼 유명하죠.





검신 김체건의 아들, 검선 김광택


그의 아버지 검신 김체건에게 어려서부터 검술을 배워온 모태 검술인 김광택. 그는 또 당시 김신선이라 불리던 김홍기를 따라다니며 각종 경신법과 술법 등을 배웠는데, 그는 서울에서 금강산까지 두 번을 왕복해도 짚신이 닳지 않을 정도로 경공술도 뛰어났다고 전해집니다. 


유본학이 지은 '김광택전'에 따르면 그의 칼춤 실력이 신의 경지에 도달해 칼에 몸을 숨겨 보이지 않는다고 평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무예도보통지'의 실기해석을 담당했던 '무사 백동수'가 바로 그의 제자며, 역사에 나타나는 뛰어난 활약상은 없지만 우리나라 검술의 체계를 잡아준 당대 최고의 검신이었습니다. 





일본의 검신


일본의 역사에도 뛰어난 무신들이 많이 존재합니다. 우리와는 다르게 일본의 조정과 귀족들은 무사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무사와 귀족의 연계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주종 관계가 형성되면서 자연히 지방에서도 뛰어난 무사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이들이 조직적으로 관리되면서 많은 무인들이 생겨났죠. 



일본인에게 가장 존경받고 있는 검성 중에 한 명

카미이즈미 노부츠나(1508~1577)


공식, 비공식적으로 일본 검술의 역사상 최고의 검객으로 알려져 있으며, 신카게류의 창시자이며, 일본의 엘리트 무사 가문의 시초라고 불리는 '야규 세키슈사이'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무사시보다 이전의 인물이지만 무사시처럼 전국을 누비며, 강호들과 대결을 펼쳐 무패의 전설을 가지고 있고, 같은 시대를 살았던 검성 츠카하라 보쿠덴과 함께 일본 역사상 최강의 검객이죠.





일본 역사 최초의 검성

츠카하라 보쿠덴(1489~1571)


검성 카미이즈미도 젊은 시절 츠카하라에게 검술을 배웠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일본 최초의 검성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39차례의 전쟁에 참전했었고, 전국을 방랑하면서 펼친 진검승부는 19차례나 있었지만 평생 그의 몸에 난 상처는 전쟁 중에 화살에 맞은 상처밖에 없었다고 할 정도로 뛰어난 검객이었습니다.  



그의 유명한 일화 중에는 '무수승류'라고 해서 '검을 빼지 않고 이기는 사람, 위험한 것은 미리 피해 가는 사람이 진정한 무사'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수승류'의 일화

그가 배를 타고 갈 때, 한 젊은 무사가 결투를 신청했다. 보쿠덴은 주위에 사람이 많으니 앞에 보이는 섬에서 싸우자고 한 후, 젊은 무사가 내리자 바로 배를 출발시켰는데 비겁하다고 외치는 젊은 무사에게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진정한 무사'라고 했다는 일화입니다. ^^;;


(진짜 비겁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네요...)





일본인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1584~1645)


일본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졌고, 또 그들이 좋아하는 인물이죠. 우리나라에서도 미야모토 무사시라고 하면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니까요^^

하지만 실제 일본 검술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분들은 그의 행적들이 미화된 부분이 많다고 주장합니다. 



두 자루 칼을 사용하는 이천일류의 시조로 그가 말년에 저술한 오륜서에는 60여 회의 실전을 치렀다고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 진검인지 목검인지는 밝혀지지 않았고 다만 당시 일본의 검술가에 의하면 그의 검술은 '귀신의 검술이며, 사람이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고 전해집니다. 

영화나 드라마 등의 소재로 많이 사용되고,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졌고 사랑받는 검객입니다.  


실제 한국과 일본의 검신 3인방이 대결을 한다면 승산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네요^^ 저는 고려 검신 척준경이 다 이길 거 같습니다만...

다음 글에는 좀 더 흥미로운 소재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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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탐관 '화신'



무속인에 불과한 일반인이 대한민국의 전체 국민들을 충격에 빠뜨린 국정농단 사건은 지금까지도 진행 중에 있습니다. 역사를 되짚어 봤을 때, 국가의 기간이 이렇게 흔들렸던 경우가 있었던가요? 그런데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최순실도 울고 갈만한 최대의 국정농단 스캔들이 존재한답니다. 단지 한 사람의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그치지 않고, 그 욕심이 국가를 패망의 길로 이끌었던 '중국 최고의 간신이자 부패의 신' 화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청나라 건륭제(1711~1799) 

조부 강희제와 아버지 옹정제의 뒤를 이어 18세기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청나라 최대의 전성기를 이룩한 황제. 

하지만 말년에는 부패와 사치로 나라가 쇠락의 길로 들어섭니다.



타고난 입담과 재치로 황제의 눈에 들다


젊은 시절 화신은 우연한 기회에 건륭제의 눈에 들었는데 건륭제는 그의 뛰어난 언변과 재치에 반했죠. 이후 황제의 총애를 받으면서 승승장구하여 권력서열 2위에 오르게 되고 자신의 아들을 건륭제의 막내딸인 화효공주와 결혼시키는 등 황제의 그늘 아래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릅니다.

이렇게 권력을 거머쥔 화신은 청나라의 모든 분야에서 온갖 비리를 저지르고 재물 모으기에 여념이 없었죠. 


사람의 욕심이란 정말 끝이 없는 거 같아요.


▼대탐관 '화신'


황제를 호위하는 일개 교위(校尉)에서 황제의 사돈이 되어 무소불위의 권력과 비리를 저질렀던 화신!

지금부터 최순실도 울고 갈 중국 역사 속 최대 국정농단 스캔들의 주역인 '화신'이 어떤 식으로 청나라를 말아드셨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황제에게 올리는 진장품 가로채기


화신은 청나라의 주요 요직을 거치면서 국가의 세금 징수와 관련된 일도 하게 되는데, 자신에게 뇌물을 바치는 이들에게는 세금을 감면해주는가 하면 일부 상인들에게는 독점권을 내어주면서 평생을 뜯어먹고 살게 됩니다. 




또한 그는 전국 각지에서 건륭제에게 올라가는 진상품도 자신이 직접 확인을 했는데 자신의 마음에 드는 진상품들은 같은 것이라도 더 좋은 것은 자기가 갖고 2급으로 분류되는 것은 황제에게 보낼 정도로 황제의 눈과 귀를 다 막고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데 있어서는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뇌물을 받고 장군을 임명


중국의 한 현에서 관원들의 횡포에 못이겨 민란이 일어났는데, 그 규모가 커져 건륭제가 화신에게 군사를 일으켜 민란을 제압하라고 명을 내립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이기든 지든 뇌물을 받고 장군을 임명하는 등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문어발식으로 뭐든지 확장해 갔었죠. 

당시 청나라의 감찰부에서는 화신의 부정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이미 조정의 모든 관료들이 화신의 손아귀에 있었기 때문에 건륭제에게 보고조차 못했다고 합니다. 

아마 보고를 했어도 바로 묵살된 채로 파면을 당했겠죠?



이렇게 모든 요직을 자신의 사람으로 채운 화신은 이후에 더 많은 재물을 노골적으로 모아들이게 됩니다.

그런데 건륭제는 화신이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그를 믿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죽을 때까지 말이죠. 





중국 역사상 최대의 재물을 긁어모으다


화신의 재물에 대한 욕심은 해가 갈수록 더 심해졌는데 죄를 진 관리에게 돈을 받고 면책해주는가 하면, 국가의 모든 사업에 개입하여 이권을 챙겼답니다.

그런데 당시 그토록 많은 부정을 저질렀어도 국가 재정이 거들 나지 않았었는데 실제로 그는 탁월한 재정 운영 능력을 또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정의 모든 주요 요직에 자신이 뇌물을 받고 임명한 관리들을 앉혀 놓는 등 이미 그 누구도 그를 어떻게 해볼 수가 없을 정도로 국가 재정을 완전히 장악했죠. 말년의 건륭제는 거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죠.


▼건륭제


1796년 건륭제가 아들 가경제에게 왕위를 물려줬는데, 태자 시절부터 화신의 부정부패를 혐오하던 가경제는 3년 후 건륭제가 사망하자 즉시 체포하여 사지를 자르는 극형을 내리지만 화효공주의 간곡한 청에 하얀 천에 목을 매 자진을 명하는데 화신의 나이 당시 50세 때의 일입니다.

 


그리고 화신이 죽자 가경제는 그의 재산을 몰수했는데 놀랍게도 그 양이 모두 9억냥으로 당시 청나라의 총예산의 12년 치를 훨씬 넘었다고 전해집니다. 

일개 관료가 모을 수 있는 재산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로 화신이 얼마나 많은 부패와 비리를 저질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건륭제는 화신이 분명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었는데도 왜 그를 막지 않았을까요?

아무튼 오늘 화신의 이야기로 간신 뒤에는 늘 권력자의 부주의와 무관심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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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북한이 정말 조용해졌습니다. 도대체 뭘 하는지 궁금할 정도로 조용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청와대를 공격한다느니, ICBM으로 워싱턴을 폭격한다느니 따다다다! 말이 많았었는데요. 하지만 이제 이런 생떼도 통하지 않을 거 같습니다. 미국의 새로운 국방장관이 제임스 매티스이기 때문이죠. 68세의 노장이지만 지금도 뼛속까지 해병대 피가 끓고 있는 일명 '매드 독(Mad god)'이니까요^^

북한은 아마 B-1B 전략폭격기보다 매티스 미 국방장관을 더 두려워할 거 같아요. 그럼 이유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고양이 앞에 쥐, 북한이 미국 국방장관을 두려워하는 이유


제임스 매티스 (James Norman Mattis)는 1969년 해병대 병사로 입대합니다. 그리고 제대 후, 자신의 적성이 군인이다 생각했는지 다시 센터럴워싱턴대 ROTC 임관 후 대장까지 오르는 전설적인 군인이 되죠. 또한 군인으로써 언제나 적국과 테러리스트에 대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으며, 지금은 미군들에게 가장 존경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간단히 그의 경력과 함께 최근 한국과 미국을 상대로 전쟁이라도 벌일 것처럼 위협했던 북한이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을 두려워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눈치 살피는 중..


'제임스 매티스' 경력

1969년 해병대 병사로 입대 후 제대.

1972년 센트럴워싱턴대 ROTC 임관 후 대장까지 진급.

2007년~2010년 미국 합동군사령부 사령관

2010년~2013년 미국 중부사령부 사령관

2007년~2013년 미국 해병대 대장

2017년~ 제26대 미국 국방부 장관


미 해병대원들의 투표가 있었는데요. 해병대 중 실제 전투에서 '가장 람보처럼 싸울 거 같은 해병대'로 매티스 국방장관이 1위를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 정말 뼛속까지 해병대라는 말이 실감됩니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의 왈,

'매티스는 전투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고, 언제나 테러리스트들을 이겼다'


매티스 미 국방은 1969년에서 2013년 복무 기간 동안 걸프전쟁, 911테러에 대한 보복 전쟁인 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리고 이라크 전쟁을 모두 직접 지휘한 실전 지휘관으로 현존하는 오리지널 리얼 라이프 히어로입니다.

또한 미국 역사상 군 장성 출신이 미국 국방장관에 오른 경우는 2차 세계 대전 때 트루먼 대통령이 임명한 조지 마셜 육군 참모총장 이후 66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네요. 


북한을 미국의 안보를 해칠 위험 국가로 보고 있는 트럼프 행정부가 '미친개(Mad god)' 매티스를 국방장관의 자리에 앉힌 이유를 알 거 같은 부분입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피 끓는 해병대 '매티스'


걸프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에서 직접 현장에서 지휘봉을 잡았던 그는 굉장히 직설적인 사람으로 알려졌는데 일전에 NBC News의 인터뷰에서 아프가니스탄 전쟁 상황을 질문 했을 때 '아프가니스탄에는 여성이 베일을 쓰지 않는 이유로 여자를 때리는 건달이 많다. 이런 놈들은 총으로 쏴야 된다'라고 할 정도로 호전적인 성격으로 '미친개', '전사승려' 등의 별명이 붙었습니다. 


물론 이런 발언들은 일부에서는 거부감을 나타내지만, 해병대로서 그리고 항상 최전선에서 전투에 임하는 군인으로서 해석한다면, 항상 전투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해병대의 자존심 묻어나는 군인의 기개라고 생각이 드네요.



매티스 미 국방장관 '어록'

적이 먼저 도발하면 반드시 모두 굴복시킨다.

해병대는 패자라는 글자를 쓸 줄 모른다.

무기를 사용하기 전에 머리부터 써라.

사냥꾼이 되지 않으면 먹잇감이 된다.

▲군인으로서 그의 가치관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북한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그의 정치적 입장


'북한의 핵위협은 미국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안보 문제로 본다.

북한에 대한 선제 타격 옵션도 생각하고 있다.' 


그가 이야기했던 이 두 문장만으로도 북한정권은 그를 가장 두려워 할 수밖에 없을 거 같습니다. 북한과 김정은이 최근 몇 년 동안 들었던 말 중에 가장 무서웠던 말이 아닐까요? ^^ 


▲2월 10일 괌 기지에 도착한 미국 항공모함 칼빈슨호 


그리고 이제 곧 있으면 열리는 3월 한미연합훈련도 북한이 그를 두려워하는 이유에 속합니다. 

미국과 한국의 첨단 무기들과 인원들이 총 집결하는 훈련이기 때문에 북한의 입장에서는 혹시나 훈련이 실전으로 변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죠.

그동안 북한의 행적들을 살펴보면 한미훈련기간에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답니다.


'2017 한미 연합훈련'은 역대 최고의 규모로 펼쳐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에 따라 칼빈슨호에 탑재된 최신 무기들 외에도 미국의 폭격기 3총사 B-1B, B-52, B-2와 F-22 스텔스 전투기, 핵 추진 잠수함, 이지스 구축함 등 

이 참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 모든 전략 자산을 매티스 미 국방이 쥐고 있기 때문에 북한으로서는 지금 가장 두려운 존재는 매티스 미 국방장관 일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에 대한 그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발자취


첫째,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은 장관으로 취임한 직후 '북한의 핵시설 격퇴 조치'를 담은 보고서를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이 부분은 실제 북한의 핵시설 파괴를 위한 행동이 실천될 수 있으며, 또는 그렇지 않고 보고서의 형태로 만들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중국과 북한에게는 상당히 큰 압박이 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둘째,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은 북한 정권을 위험하고 신뢰할 수 없는 존재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한때 오바마 행정부 시절 이란에 대한 평가와 같은데, 당시 그는 오바마의 이란 핵 협상을 비판해 온 강경파죠.


그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

'적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전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적을 괴멸시켜야지 전쟁은 비로소 끝나는 것입니다.'


(미국과 동맹국을 위협하는 적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답변입니다.)



세째,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은 이란과 북한을 전세계에 대한 위협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란은 핵 협상 이후에 미사일 시험발사를 강행했는데, 트럼프 행정부와 매티스는 이 부분에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당시 인터뷰 내용 중에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 이외에도 군사적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어필을 했었고, 미국의 상원 외교위원장 역시 북한과 이란의 위협적인 행동에 대해서 더이상 인내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는 점입니다.





북한은 그동안 자신들이 추진했던 정책노선에서 이제는 새로운 시도와 변화를 해야 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핵과 미사일을 앞세워 전세계를 상대로 도박을 한다면 이제는 분명 그에 대한 책임이 따를 수 있다는 것을 꼭 알았으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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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48년 전 1969년 3월, 중국과 소련의 국경지역인 우수리강의 작은 섬 '전바오섬'은 중국과 소련, 어느쪽에도 영유권이 없었기 때문에 좁은 섬에 양국의 국경경비대가 함께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과 소련은 이념적 대립이 있었던 시기인데 이 지역은 양국 간의 갈등을 표출했던 대표적인 장소로 변합니다. 그리고 얼마후 양국 경비대간의 몸싸움이 발생하는데.. 이 몸싸움이 국제 사회에 큰 획을 그읏던 사건의 시초가 됩니다. 



사건의 발단은 국경 경비를 담당하는 양국 군인들의 자존심이 걸린 몸싸움이 원인이었습니다. 


이십 년 동안 이어진 중국과 구소련의 갈등



당시 양국의 사회적 분위기는 '쇼윈도 부부'였다?


1956년 2월 소련의 흐루시초프 총리는 1인 독재노선에 대해서 비판하는 연설을 하는데 중국의 모택동 역시 1인 독재체제였기 때문에 그는 흐루시초프의 발언에 격분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양국의 갈등은 깊어졌고 결국 1960년도에 소련은 중국과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중국에 있는 군사기술자들과 공업 자원들을 철수시킵니다. 화가난 중국은 급기야 자신들이 공산주의의 정통이라고 내세우며 소련의 흐루시초프를 '공산주의의 적'이라고까지 비난을 하며 대립을 합니다. 


결국 공산주의라는 한 식탁에 앉아 있었던 중국이 

흙 묻은 발을 올리게 되는데...




이런 갈등 속에서 중국은 1964년 드디어 핵 실험에 성공하였고, 이때부터는 소련군과 자주 자존심을 건 싸움을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양국 대표 군인들의 몸싸움이 원인이 되어 핵전쟁이 될뻔한 '우수리강 사건'입니다.



사건의 시초

농담을 주고받던 사이에서 주먹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다.


양국의 국경경비대는 얼어붙은 작은 섬에서 처음에는 서로가 사이가 좋았습니다. 남자들은 담배 한 대 나눠피우면 금방 친해지니까요.^^

아마 이들도 처음에는 그랬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도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농담으로 시작했던 영토 소유권에 대한 언쟁이 곧 몸싸움으로 발전했고, 양쪽 경비대들은 자존심을 건드리며 몸싸움을 했는데...

모든 싸움이 그렇듯이 결국에는 주먹싸움이 되었고, 이게 또 하다 보니 패싸움으로까지 번지게 되었습니다.



중국 VS 소련. ROUND 1

작은 고추가 맵다? NO


그런데 싸움의 시작은 누가 했을까요?

당연히 불곰국 군인이 먼저 시작을 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선방은 체격이 훨씬 작은 중국군이 날렸습니다. 

물론 결과는 소련군 승!


▼괜히 덤볐어..


중국 VS 소련. ROUND 2

군인과 국가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다


먼저 시비를 건 중국군은 체격이 훨씬 큰 러시아군에게 상대 자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얼어붙은 강 위에서 중국 경비대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소련군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었죠. 그런데 첫 패배를 설욕하려고 중국 경비대는 다음날에도 소련군을 찾아가 시비를 걸고 패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개머리판을 세워서 달려드는 중국 경비대


결과는 다시 한 번 소련군이 이겼는데 중국은 이 패싸움으로 국경경비대와 중국의 체면이 곤두박질칩니다. 

일반인의 싸움이라면 모를까 군인 VS 군인의 싸움이기에 어찌 보면 국가의 체면이 걸린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싸움에서 두 번이나 패했으니 중국 군부에서 얼마나 이를 갈았을까요?


체면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중국은 여기서 꾀를 냅니다. 그리고 다시 반격을 준비하는데...




중국 VS 소련. ROUND 3

중국의 복수혈전!


중국은 국경경비대 대원들을 전부 교체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최정예 특수부대원들로 전부 교체하는데 이들은 동북지역을 담당하는 제49야전군 소속의 특수부대원들이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중국 군대에서 한가락 하는 실전 무술의 베테랑들이었는데.. 이 사실을 모르는 소련군들은 두 번이나 두들겨 팼던 중국군을 다시 만나자 이들을 놀리기 시작하였고, 또 한 번 양측 간에 패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체구만 믿고 까불었던 소련군은 중국의 특수부대원들에게 일방적으로 깨지고 부상자들을 겨우 부축하여 부대로 복귀합니다. 


이렇게 2패 후, 1승을 겨우 거둔 중국군이 소련군에게 통쾌한 복수를 하면서 이 사건은 마무리가 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불곰국 군인들이 절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죠. 

소련 국방경비대의 대장은 상부에 상황을 보고하여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특수부대원을 부대에 배속시켜줄 것을 요구하였고 승인이 떨어지자 소련 국경경비대 인원을 모두 극동방면군 소속 특수부대원들로 전원 교체합니다. 



작은 섬에서 시작된 군인들의 어깨싸움이 

국가의 군대를 대표하는 양국의 특수부대의 싸움으로 발전합니다.


복싱 잽으로 무장한 소련 특수부대의 지휘관 등장.


중국 특수부대에 복수를 하기 위해서 파견된 소련군 특수부대의 지휘관은 다리에 장애가 있었는데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난 싸움에서 승리한 중국군 특수부대원들은 그를 얍잡아 보고 또다시 먼저 싸움을 걸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일대일의 싸움에서 소련 지휘관의 잽 앞에 중국군 특수부대원들의 코가 완전 아작이 납니다. 녹다운1, 녹다운2, 녹다운3,, 

결국엔 잽의 귀재인 소련군 지휘관에게 중국군은 전부 코 뼈가 부러진 채 부대로 복귀하는 수모를 겪죠^^


▼병법의 마지막 단계 - 36계 줄행을 시전 중인 중국군 특수부대


중국 무술의 본고장 산둥성 출신 '산둥꼬마'의 출현


'산둥꼬마'

실존 인물로 '전바오섬'에서 소련 특수부대 지휘관과 1:1 싸움 중 권총 7발을 맞았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난 인물.

중국정부는 1969년 8월 1일에 그에게 영웅칭호'를 내렸습니다. 


중국군에서도 최정예로 알려진 제49집단군 소속 특수부대원들의 패배로 중국 군부는 노발대발하여 묘안을 찾기에 나섰고,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그 유명한 '산둥꼬마'로 알려진 중국군 최고의 무술가였습니다. 

그는 체격이 큰 소련군고의 패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부대에 목봉술을 전수합니다. 



양국 특수부대원들의 자존심 싸움이 핵 전쟁의 위기까지..


그리고 때가 되자 다시 한 번 양국의 특수부대원들은 시비가 붙었는데 목봉술로 무장한 중국군에게 소련군은 말 그대로 묵사발이 되었습니다. 이를 보고 있던 소련 지휘관은 산둥꼬마에게 1:1을 신청하고 승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의 목봉술에 두들겨 맞기만 하다가 홧김에 그를 향해 7발의 권총을 쏘는데..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보던 중국과 소련의 경비대는 곧 교전에 들어가 인명피해까지 발생하게 됩니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중국과 소련의 핵 전쟁을 촉발 시킬 뻔했던 '우수리강 사건'입니다. 



결국 중국과 소련군의 특수부대원들의 어깨싸움(자존심)이 원인이 되어 2차례의 교전 끝에 중국군은 800여 명, 소련군은 6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국경에는 중국군 80만 명과 소련군 60만 명 등 대규모 병력이 동원되어 명령만 기다리며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소련의 알렉세이 코시긴 총리는 중국에 대한 선제 핵 공격을 계획했을 정도로 당시 상황은 중국과 소련, 형제국 간의 핵전쟁 발발의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갔었는데 다행히 그해 9월 소련 총리의 북경 방문을 계기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전바오섬' 충돌을 계기로 중국은 소련을 주된 적이라 명했고, 미국과는 핑퐁외교를 통해 화해의 시대를 열어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중국과 러시아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면서 미국을 견제하고 있는데, '국제 사회에서는 정말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라는 말이 실감이 나네요.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공감은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준 역사입니다. 두 차례에 걸친 전란으로 국토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전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무인들은 일본 검술이 실전에서 조선의 검술보다 강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후 왜검 도입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당시 왜검의 도법은 겉치레가 없고 오직 살수를 위한 검법으로 알려져있어서 실전에서는 왜검 만큼 강한 것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왜검을 우리가 배울수는 없을까? 

조선 후기 일본의 왜검을 몰래 익혀 검신의 경지까지 오른 이가 있습니다. 고려에 검신 척준경이 있었다면 조선에는 검신 김체건이 있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일본의 검술을 배워 일본을 베려고 했던 조선의 검신 이야기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기 무섭게 병자호란으로 다시 국토는 유린 당하고, 왕은 청에 무릎을 꿇게 되어 그야말로 이제는 막강한 힘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할 즈음, 


기병, 화약술, 병법 보다 실전 전투에서 더 중요하게 여겨졌던 검술! 조선은 검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당시 실전에서 최고로 알려진 일본의 검술이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만약 다시 외세의 세력이 침입해 왔을 때 두 번 다시 같은 치욕을 반복하지 않고 그들의 검법으로 그들을 베기 위해서 꼭 필요했습니다. 

결국 숙종 때 이러한 노력과 의지로 조선 최고의 검신이 탄생하게 되는데..



"왜관에 숨어들어 검술을 익힌 검신 김체건"


숙종 대에 훈련도감의 *군교였던 김체건은 왜관에 숨어들어 왜검의 기법을 훔쳐 배우게 됩니다. 

(숙종 5년)


<참고>

*군교 : 군대의 장교, 군관, 왕의 경호 등의 업무에 종사하는 중인 계급.


검신 김체건의 이야기는 유본학이 지은 <김광택>전에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일부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김체건은 숙종 때 훈련원에서 무예를 더 익히기로 하였는데, 조선의 검술이 왜인들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스스로 왜관에 숨어 들어가 하인 노릇을 하였다...(중략)... 체건은 그들끼리 검술을 겨눌 때 남 몰래 지하에 숨어 엿보았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자 왜인의 검법을 다 익히게 되었다."


이렇게 그의 검법에 대한 열정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정말 영화 같은 이야기네요^^



3년의 시간이 흐르고 


그는 왜검의 고수가 되어 훈련도감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이제 남은 일은 자신이 배운 검술을 조선의 군영에 보급하여 다시는 왜놈들에게 국토가 짓밟히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과 그들의 검술로 그들을 베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왔습니다. 

드디어 숙종 앞에서 그동안 자신이 갈고닦았던 왜검 실력을 평가받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당시 그가 숙종 앞에서 검술 시범을 보일 때, 땅에 재를 뿌려놓고 맨발로 시범을 보였습니다.

양쪽 엄지발가락으로 재를 밟고 춤추듯 펼쳐진 경이로운 검술 시범이 끝나자 구경하던 관리들과 숙종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명 재 위에서 시범을 보였는데 뿌려놓은 재에 발자국이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그의 무예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숙종은 그의 검법을 보고 감동하여 김체건을 당장 검법 교련관으로 임명하고 조선군에게 전수하도록 하였습니다. 



여기서 잠시 의문이 생기는 부분이 있는데..

겨우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왜검을 검신의 경지까지 익힌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더군다나 정식으로 배운 것도 아니고 몰래 숨어서 익힌 검술인데,, 이 부분에서 허구적인 부분이 많이 포함되었나 싶어서 자료를 좀 찾아보니 김체건은 왜검을 배우기 훨씬 전부터 상당한 검법의 대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숙종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숙종실록> 숙종 8년 10월

"훈국 군병 중에 발 놀림이나 몸놀림이 몹시 빠르고 날래고 힘이 있으며 무예에 능한 1인을 선발하여 왜인의 검술을 배우게 했고,,,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많은 군병 중에 단 1인,


이 대목에서 이미 김체건은 당시 수많은 군병들 중에서 제일 뛰어난 검술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경지에 올라 있었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3년이라는 시간이 결코 그에게 짧은 시간은 아니었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가 배워 온 왜검은 <무예도보통지>에 토유류, 운광류, 천유류, 유피류 이렇게 4류와 함께 그림과 글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일본 영화나 만화에서 들어본 듯한 뭐뭐류~~ 뭐뭐류~~ 이런 느낌이네요 ^^


그런데 실제로 지금 일본에서 전해내려오는 검법 중에는 위에 언급한 유파가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유명한 검법이 아니라는 설도 있고 당시 일본에는 굉장히 많은 유파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극히 일부만 전해져 내려왔고 대부분 많은 유파의 검술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조선 최고의 검신, 김체건

"나는 단지 국가가 약해서 외세의 침입에 백성과 국토가 유린당한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무인들이 약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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