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사건, 일본이 지금까지 숨기려는 이유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역사의 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조선의 국모가 일본의 조선침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일본 공사 미우라고로의 지휘아래 '여우사냥'이라는 작전명으로 조선의 국모를 처참하게 시해한 사건입니다. 

그들이 이 전대미문의 사건을 일으켰던 원인과 숨겨야 했던 이유는? 지금 현재 대한민국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과거 일본이 저질렀던 악랄했던 사건을 다시 재조명 해보겠습니다.



"시대적 배경


조선을 놓고 한 판 승부를 벌인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합니다. 이제 그들은 청나라의 간섭없이 조선에 막대한 영향력을 펼치는 동시에 멀리 만주까지 세력을 넓히려는 야욕에 불탑니다. 

갑오개혁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조선의 내정에 관섭했던 일본은 조선에 친일 내각을 형성하여 이후 본격적으로 조선 침략을 시작하려는 시기였습니다.

이 당시 친일 내각의 구성원으로 김홍집, 박영효가 있습니다. 




"당시 일본이 한 나라의 국모를 시해한 원인"


일본은 조선 침략을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모색하는 상황에서 명성황후는 친일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인 베베르의 도움을 받아 친러세력을 세우면서 일본인들의 압박하기 시작하는데,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결국에 '여우사냥' 이라는 작전명 아래 황후의 암살을 계획합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가담자들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서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려고 했습니다. 

당시 주한일본공사로 임명된 미우라는 '여우사냥' 작전을 위해 대원권 세력의 협조를 받았으며 일본 공사관 직원을 문관대시 무관출신으로 교체합니다.


▼범행에 가담한 상당수가 지식인이며 이후 일본의 장관직을 지낸 사람도 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과정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 정체불명의 무리들은 경북궁 정문으로 들이 닥치며 궁궐을 수비하고 있던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과 일행을 살해하고, 고종의 침전인 곤령전에 난입하여 고종의 어의를 찢고 세자에게 칼을 겨누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과 일본인 복장을 한 이들의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궁궐 수비대는 일시에 괴한들에게 장악됩니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이들을 막자 총으로 사살한 후 고종이 보는 앞에서 다시 한 번 칼로 베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궁궐을 순식간에 장악한 이들은 명성황후의 침실인 옥호루로 곧장 난입하여 궁녀들을 악랄한 방법으로 살해하고 황후에게 칼로 상처를 입힌 후 옥호루에서 끌어냅니다. 이후 이들이 벌인 끔찍한 만행은 차마 입으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는데 이들은 명성황후의 시신에 온갖 모욕적인 일들을 저지런 후 인근 녹원 솔밭에서 시신에 석유를 뿌리고 불에 태워버립니다. 



완전 범죄를 위해 흔적을 지운 그들은 도주했는데 이후 이 사건의 범인이 홍선대원군과 조선의 군인이라고 주장합니다.

일본에서는 이들의 만행이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전원 무죄석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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