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48년 전 1969년 3월, 중국과 소련의 국경지역인 우수리강의 작은 섬 '전바오섬'은 중국과 소련, 어느쪽에도 영유권이 없었기 때문에 좁은 섬에 양국의 국경경비대가 함께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과 소련은 이념적 대립이 있었던 시기인데 이 지역은 양국 간의 갈등을 표출했던 대표적인 장소로 변합니다. 그리고 얼마후 양국 경비대간의 몸싸움이 발생하는데.. 이 몸싸움이 국제 사회에 큰 획을 그읏던 사건의 시초가 됩니다. 



사건의 발단은 국경 경비를 담당하는 양국 군인들의 자존심이 걸린 몸싸움이 원인이었습니다. 


이십 년 동안 이어진 중국과 구소련의 갈등



당시 양국의 사회적 분위기는 '쇼윈도 부부'였다?


1956년 2월 소련의 흐루시초프 총리는 1인 독재노선에 대해서 비판하는 연설을 하는데 중국의 모택동 역시 1인 독재체제였기 때문에 그는 흐루시초프의 발언에 격분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양국의 갈등은 깊어졌고 결국 1960년도에 소련은 중국과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중국에 있는 군사기술자들과 공업 자원들을 철수시킵니다. 화가난 중국은 급기야 자신들이 공산주의의 정통이라고 내세우며 소련의 흐루시초프를 '공산주의의 적'이라고까지 비난을 하며 대립을 합니다. 


결국 공산주의라는 한 식탁에 앉아 있었던 중국이 

흙 묻은 발을 올리게 되는데...




이런 갈등 속에서 중국은 1964년 드디어 핵 실험에 성공하였고, 이때부터는 소련군과 자주 자존심을 건 싸움을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양국 대표 군인들의 몸싸움이 원인이 되어 핵전쟁이 될뻔한 '우수리강 사건'입니다.



사건의 시초

농담을 주고받던 사이에서 주먹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다.


양국의 국경경비대는 얼어붙은 작은 섬에서 처음에는 서로가 사이가 좋았습니다. 남자들은 담배 한 대 나눠피우면 금방 친해지니까요.^^

아마 이들도 처음에는 그랬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도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농담으로 시작했던 영토 소유권에 대한 언쟁이 곧 몸싸움으로 발전했고, 양쪽 경비대들은 자존심을 건드리며 몸싸움을 했는데...

모든 싸움이 그렇듯이 결국에는 주먹싸움이 되었고, 이게 또 하다 보니 패싸움으로까지 번지게 되었습니다.



중국 VS 소련. ROUND 1

작은 고추가 맵다? NO


그런데 싸움의 시작은 누가 했을까요?

당연히 불곰국 군인이 먼저 시작을 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선방은 체격이 훨씬 작은 중국군이 날렸습니다. 

물론 결과는 소련군 승!


▼괜히 덤볐어..


중국 VS 소련. ROUND 2

군인과 국가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다


먼저 시비를 건 중국군은 체격이 훨씬 큰 러시아군에게 상대 자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얼어붙은 강 위에서 중국 경비대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소련군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었죠. 그런데 첫 패배를 설욕하려고 중국 경비대는 다음날에도 소련군을 찾아가 시비를 걸고 패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개머리판을 세워서 달려드는 중국 경비대


결과는 다시 한 번 소련군이 이겼는데 중국은 이 패싸움으로 국경경비대와 중국의 체면이 곤두박질칩니다. 

일반인의 싸움이라면 모를까 군인 VS 군인의 싸움이기에 어찌 보면 국가의 체면이 걸린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싸움에서 두 번이나 패했으니 중국 군부에서 얼마나 이를 갈았을까요?


체면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중국은 여기서 꾀를 냅니다. 그리고 다시 반격을 준비하는데...




중국 VS 소련. ROUND 3

중국의 복수혈전!


중국은 국경경비대 대원들을 전부 교체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최정예 특수부대원들로 전부 교체하는데 이들은 동북지역을 담당하는 제49야전군 소속의 특수부대원들이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중국 군대에서 한가락 하는 실전 무술의 베테랑들이었는데.. 이 사실을 모르는 소련군들은 두 번이나 두들겨 팼던 중국군을 다시 만나자 이들을 놀리기 시작하였고, 또 한 번 양측 간에 패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체구만 믿고 까불었던 소련군은 중국의 특수부대원들에게 일방적으로 깨지고 부상자들을 겨우 부축하여 부대로 복귀합니다. 


이렇게 2패 후, 1승을 겨우 거둔 중국군이 소련군에게 통쾌한 복수를 하면서 이 사건은 마무리가 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불곰국 군인들이 절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죠. 

소련 국방경비대의 대장은 상부에 상황을 보고하여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특수부대원을 부대에 배속시켜줄 것을 요구하였고 승인이 떨어지자 소련 국경경비대 인원을 모두 극동방면군 소속 특수부대원들로 전원 교체합니다. 



작은 섬에서 시작된 군인들의 어깨싸움이 

국가의 군대를 대표하는 양국의 특수부대의 싸움으로 발전합니다.


복싱 잽으로 무장한 소련 특수부대의 지휘관 등장.


중국 특수부대에 복수를 하기 위해서 파견된 소련군 특수부대의 지휘관은 다리에 장애가 있었는데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난 싸움에서 승리한 중국군 특수부대원들은 그를 얍잡아 보고 또다시 먼저 싸움을 걸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일대일의 싸움에서 소련 지휘관의 잽 앞에 중국군 특수부대원들의 코가 완전 아작이 납니다. 녹다운1, 녹다운2, 녹다운3,, 

결국엔 잽의 귀재인 소련군 지휘관에게 중국군은 전부 코 뼈가 부러진 채 부대로 복귀하는 수모를 겪죠^^


▼병법의 마지막 단계 - 36계 줄행을 시전 중인 중국군 특수부대


중국 무술의 본고장 산둥성 출신 '산둥꼬마'의 출현


'산둥꼬마'

실존 인물로 '전바오섬'에서 소련 특수부대 지휘관과 1:1 싸움 중 권총 7발을 맞았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난 인물.

중국정부는 1969년 8월 1일에 그에게 영웅칭호'를 내렸습니다. 


중국군에서도 최정예로 알려진 제49집단군 소속 특수부대원들의 패배로 중국 군부는 노발대발하여 묘안을 찾기에 나섰고,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그 유명한 '산둥꼬마'로 알려진 중국군 최고의 무술가였습니다. 

그는 체격이 큰 소련군고의 패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부대에 목봉술을 전수합니다. 



양국 특수부대원들의 자존심 싸움이 핵 전쟁의 위기까지..


그리고 때가 되자 다시 한 번 양국의 특수부대원들은 시비가 붙었는데 목봉술로 무장한 중국군에게 소련군은 말 그대로 묵사발이 되었습니다. 이를 보고 있던 소련 지휘관은 산둥꼬마에게 1:1을 신청하고 승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의 목봉술에 두들겨 맞기만 하다가 홧김에 그를 향해 7발의 권총을 쏘는데..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보던 중국과 소련의 경비대는 곧 교전에 들어가 인명피해까지 발생하게 됩니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중국과 소련의 핵 전쟁을 촉발 시킬 뻔했던 '우수리강 사건'입니다. 



결국 중국과 소련군의 특수부대원들의 어깨싸움(자존심)이 원인이 되어 2차례의 교전 끝에 중국군은 800여 명, 소련군은 6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국경에는 중국군 80만 명과 소련군 60만 명 등 대규모 병력이 동원되어 명령만 기다리며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소련의 알렉세이 코시긴 총리는 중국에 대한 선제 핵 공격을 계획했을 정도로 당시 상황은 중국과 소련, 형제국 간의 핵전쟁 발발의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갔었는데 다행히 그해 9월 소련 총리의 북경 방문을 계기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전바오섬' 충돌을 계기로 중국은 소련을 주된 적이라 명했고, 미국과는 핑퐁외교를 통해 화해의 시대를 열어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중국과 러시아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면서 미국을 견제하고 있는데, '국제 사회에서는 정말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라는 말이 실감이 나네요.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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