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조국 미국의 최첨단 무기 TOP 7


천조국이라고 불리는 미국에는 다른 나라에서는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최첨단 무기들이 있습니다. 전장에서 이미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무기들이 있는가 하면 러시아, 중국 등 미국과 비슷한 국방력을 가진 나라에서는 미국에만 있는 최첨단 무기를 모델로 모방아닌 모방으로 무기 연구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무기들은 이미 전장에 배치되어 작전을 수행하거나 사용하고 있는 무기들입니다.




1. MQ9리퍼 드론


MQ-9리퍼 드론은 처음에는 프레데터 B라고 불렸습니다. MQ-9리퍼라는 이름이 생소하신 분들은 프레데터B라는 이름은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가격은 대당 360억입니다. 최대이륙중랴은 4톤으로 다량의 무기를 적재할 수있습니다. 




미군의 무인항공기 중에서 가자 큰 크기를 자랑하며, 15km 상공에서 지상의 자동차 번호판 번호까지 식별할 수 있습니다. 

리퍼의 비행가능시간은 총 36시간으로 230kg의 폭탄을 적재하여 작전을 수행합니다. 







2. AA12 애치슨 산탄총


미국의 유명한 총기제작자 맥스웰 애치슨이 만든 총기로 드럼통처럼 생긴 드럼탄창과 막대탄창을 사용합니다. 

탄창에는 드럼통탄장은 20발 장전, 막대탄창은 8발을 장전할 수 있다고 하는데 위력은 강한편이지만 총 자체가 오픈볼트여서 명중률은 바닥입니다.


AA12 애치스 산탄총은 초당 12발을 발사할 수 있으, 9천발을 연속해서 사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명중률이 낮지만 미국이 해병대에서는 많이 사용하는 산탄총입니다. 







3. ADPTV 클로킹 탱크


ADPTV 클로킹 탱크는 전차의 외부가 적에게 쉽게 노출되지 않도록 외형을 클로킹할 수 있는 탱크입니다. 

이러한 기능은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미국에만 있는 특수한 기술로 최첨단 기능이며 적이 적외선 탐지기로 발견했을 때 

적에게는 일반 자동차로 보일 수 있게 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투명망토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4. The Active Denial System (ADS)


한글로 풀어쓰면 능동 해산 시스템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 수많은 군중들을 해산시키기 위해서 무력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LA폭동과 영국에서 있었던 폭동에서 군중에서 최대한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개발되었습니다. 


총탄이 아닌 강한 전자파를 발사하여 적을 일시에 제압하는 무기입니다. 일명 '굿바이 무기'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사람을 상대로 실전에 투입된 시기는 아프카니스탄전에서 실제로 작전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원리는 강한 전자파가 인체의 피부에 닿으면 피부의 물분자를 진동시켜 매우 뜨거운 열을 만들어 내는데 이 높은 열 때문에 괴로워하다 투항한다고 하네요. 







5. 레이저 어벤져


보잉사에서 개발한 차량에 레이저를 장착한 대공방어무기입니다.어벤져에 레이저가 탑재되어 있는데 처음 테스트를 할 때는 가볍게 여러 박격포탄과 지상에 있는 무인기 2대를 파괴하는데 성공했다고합니다. 그리고 레이저 무기의 가장 큰 장점이 거리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00km 정도 떨어진 적의 장비를 파괴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6. MAARS 로봇


‘모듈식 첨단 로봇 무기시스템(MAARS:Modular Advanced Armed Robotic System)'으로 각종 무기들을 장착한 후 단독, 또는 보병과 함께 이동하면서 작전을 수행하게 됩니다. 귀엽게 보이는 외모에도 불구하고 전장에서는 모두가 두려워하는 파괴력 있는 장비입니다. 

이 무기의 장점은 원격제어가 가능한데 전투시 발생하는 부상병을 구출하는 역할도 함께 한다.








7. XM25 공중폭발탄 발사기


게임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무기입니다. 독립형 불펍 공중폭발탄발사기로 총신 위에 장착된 XM104 장비로 25mm 저속 공중폭발탄을 적의 머리 위에서 폭발시켜 효과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K-11 복합소총이 있지만 방산비리로 엉터리 소총이라고 불리고 있죠... 참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언제쯤 방산비리가 없어질지..









세계에서 인정받는 한국 군대의 무기 Top 7

대한민국은 육군, 공군, 해군, 해병대, 특수부대로 구성된 약 65만 여명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국방비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나라는 660조를 사용하는 미국이며, 두 번째로 중국이 240조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일 년에 40조 가량을 국방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다양한 무기체계를 직접 생산하고 전력화하기 위해서 꾸준히 연구를 하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생산된 세계에서도 인정받고 있는 우리 군의 무기가 있습니다. 



7위. 천마 지대공미사일



천마는 대한민국 육군 방공포병 및 대한ㅁ니국 공군 방공포병에서 운용중인 단거리 지대공 미사일입니다. 

피아식별 결과 저기로 판단됐을 때 사격 명령을 내리면 적외선 측각기는 유도탄 후미의 열을 감지하여 

추적 레이더의 빔폭으로 유도하며 추적 레이더는 이 유도탄을 적기까지 꾸준하게 유도하고 유도탄은 적기의 

3~8m 사이에 접근했을 때 폭발하게 됩니다. 

이때 폭발하는 파편은 약 3000개로 명중률은 100%에 가깝다고 합니다. 


천마 레이더 제원 : 탐지 거리-거리 20km, 고도 5km, 추적 거리-거리 16km, 고도 5km




6위. K-55 자주포


k-55 자주포는 대한민국에서 생산된 자주포이며 1986년부터 1996년까지 약 1천대 가량 생산되었습니다. 

현재느 k-9자주포로 대체되었지만 아지도 그 수가 많고 현재 대한민국의 주력 자주포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k-55의 장갑은 적의 사격으로부터 승무원과 탄약을 보호할 수 있으며, 장갑의 능력이 이미 입증되어 32개국에서

직수입을 하고 면혀 생산을 하는 곳도 있습니다. 




5위. F-15K 전투기


대한민국 공군의 주력 전투기로 총 61대가 현재 운용중에 있으며 다목적 전투기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F-15K는 F-15E의 최신 파생형 모델로 4세대 전투기로 미국의 보잉사가 제작했습니다. 


공대공 공격능력이 우수하며, 높은 엔진의 성능과 공대지 능력을 갖춘 F-15K는 대한민국 주변 국가의 일부도

작전반경에 포함되기 때문에 유사시 상대국의 공격시 에 대한 대응능력을 갖기 때문에 전쟁억지도 가능합니다 




4위. 손원일 잠수함


대한민국 해군의 최신예 214T급 잠수함으로 디젤 잠수함 중 최신예 잠수함입니다. 

약 2주간 수중작전이 가능하며 연료전지를 사용함으로써 같은 기종인 스웨덴, 일본에 비해서 

압도적인 은밀함이 자랑입니다. 


8개의 533mm 어뢰발사관이 탑재되어 있고 한국형 토마호크 미사일인 천룡이 탑재됩니다. 





3위. 세종대왕 구축함


세종대왕급 구축함은 대한민국 해군의 첫 번째 이지스 구축함이며 건조비는 1대당 1조원에 이릅니다. 

한국의 대양해군 광역 방공의 핵심전력이며 승조원은 약 300명에 이르며 항속거리는 1만Km를 자랑합니다. 


주무기로는 SM-2블록 IIIB 미사일을 주력으로 장착하며 천룡 순항미사일, 홍상어 대잠로켓, 해성 대함미사일

등이 장착됩니다. 




2위. K2 흑표 MBT


K-2 흑표전차는 대한민국 육군이 채용한 차기 전차입니다. 

세계 전차순위 2위 안에 드는 대한민국의 대표 전차입니다. 승무원은 3명이며 엔진 출력 1500마력, 가격은 

대당 80억원에 이릅니다. 


2003년부터 정식 개발이 시작되어 2008년에 공개된 제원으로느 미국의 M1 에이브람스 탱크와 세계의 

유명한 전차와 비슷한 수치 또는 그 이상의 능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1위. K9 자주포


연평도 포격에 사용되었으며 가격은 약 40억원입니다. 

대한민국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한 자주포로 우리나라가 자신있게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국산 명품 무기 1호입니다. 

이미 연평도 포격에서 먼저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신속하게 대응사격을 해서 실전에서 이미 검증이 되었습니다. 


승무원은 5명이 탑승하며 중랴은 40톤에 이르며 67Km의 속도를 자랑하며 부드러운 탑승감과 사격시 충격을 흡수하여

스페이드 없이 연속해서 사격이 가능합니다. 

주무장은 52구경장/155mm 강성포를 사용합니다. 사거리는 40Km이며, 지속사격은 분당 2~3발, 급속사격은 6~8발입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무기 Top 7이었습니다. 




지구인 중 가장 위대했던 육전사령관 Top 10

역사적으로 보면 손에 꼽히는 육전사령관이 많습니다. 이미 지구인의 경지를 뛰어넘어 외계스러운 통찰력과 전투력으로 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이끈 주역들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역사적으로 수많은 전투에서 신의 능력을 자랑했던 사령관이 많지만 오늘은 전세계에서 지구인 중 가장 위대했던 육전사령관 Top 10입니다. 그럼 살펴 보겠습니다. 



10. 가르친링


티벳의 가장 위대한 전쟁영웅 가르친링입니다.

계속되는 당제국의 침략을 전투력이 약한 토번의 군사로 수차례 막아낸 티벳의 전쟁영웅입니다. 

승패가 무려 50전 50패의 불패의 장군이며, 유명한 일화로는 가르친링이 소년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부대를 이끌고 당시 백제 수도인 부여를 침략하고 유리했던 당시 소정방의 군대를 격파하였고,

추후에 정식 장군이 이후엔 고구려를 멸망시켰던 설인귀와 전쟁을 하여 그를 굴복시켰습니다. 

하지만 가르친링은 당시 왕권 강화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반역죄를 뒤집어 쓰고 그의 가문은 

대대적인 숙청을 당하는데 그는 결국 자신이 죽는 것이 자신의 토번을 살리는 것이라 생각하고 투신을 하게 됩니다. 

가르친링의 대표적인 전투로는 5만의 토번군으로 30만 당군을 격파했었던 소라한산 전투는

그의 전술도 매우 뛰어났음을 알 수 있는 전투입니다. 




9. 구스타프 2세 아돌프


1594~1632년,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스웨덴의 왕이면서 핀란드의 대공이었으며, 

북방의 사자라는 별명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특히 외국어에 능통했으며 당시 스웨덴의 군대는

너무나 약했었다. 기술이나 군대 지식이 없었고, 군대의 무장 또한 매우 열악했다.

그는 이후 무기를 제조하는 자국의 장인들의 세금을 면제해주었으며 유럽의 산업 노하우와 사업자들을

스웨덴으로 이주할 수 있게 하였고 이는 이후에 스웨덴의 산업과 군사의 기초를 만드는 계기를 만든 

장본인이였습니다. 그는 스웨덴을 1세기동안 유럽의 강대국으로 이끈다.

그리고 근대 군사접근전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전투 무기의 간소화와 경량화 등 전투에서 대포의 소구경화로 전투의 판도를 바꿔버립니다.

이후 그는 뤼첸 전투에서 사망하게 됩니다. 



8. 율리우스 카이사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정략과 전투에 대한 천재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임기응변의 대가라고 할 수 있으며 갈리아 총연합군의 수장 베르킨게토릭스와이 대전에서 

8만의 카이사르군이 26만의 갈리아군에게 포위 당하게 되었는데 그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서

전세를 역전시킵니다. 그리고 유명한 전투로 당시 지중해 해적을 완전히 토벌한 로마 최고의 장군이라는

폼페이우스와 전쟁인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자신의 군대보다 7배나 많은 기병을 보유했던 폼페이우스의 

군대에게 승리를 하게 됩니다. 



7. 한신


너무나도 유명한 중국의 명장인 한신입니다. 초나라를 무느뜨렸으며 한나라를 통일한 가장 

절대적인 공을 세운 한신은 중국 최고 지휘관으로 불리는 건한삼거로 통합니다. 

위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했던 한읍전투는 그의 뛰어난 지략으로 승리를 이끌고,

배수의 진으로 유명한 정형전투는 조나라의 20만 대군을 1만 정예병과 2만의 노인과 아녀자들을 

데리고 승리한 전투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조나라를 상대로 펼쳤던 살수대첩은 그의 뛰어난 

지략을 다시 한 번 보여준 전투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로는 한나라 건국 후 참수를 당하게 됩니다. 



6. 티무르


티무르 제국을 건국한 명장이며 인류역사상 최후의 유목민 정복자입니다.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나서 임관을 하게 되는데 이후 기병 60기로 적의 1000기병을 무찌르며

그의 대단한 활약은 시작됩니다. 

티무르의 전투를 보면 심리전과 그가 징키스칸의 휴예라고 자처했던 만큼 징기스칸과 

유사한 전략을 사용하였습니다. 전격전과 정보공작으로 인한 적군에게 항상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다양한 무기체계와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으로 그의 제국을 이루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5.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조금은 생소한 분인데요. 이슬람 칼리프제국 시절의 장군으로 그의 별명으로는 

'신께서 뽑아든 검' 이라는 이슬람 세계의 최고의 장군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당시 이슬람 제국이 확대하는데 많은 공을 세우게 됩니다.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왜 세계에서 가장 위대했던 육전사령관으로 불리는지 알 수 있습니다. 

1만 5천의 병력으로 페르시아를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동로마제국의 지리아 지배를 종식시켰으며

3개월 만에 당시 아라비아 반도를 제패했다고 보면 됩니다. 

그의 부대에는 기병이나 중기병도 없었고 전투력이 약한 경기병으로 페르시아와 동로마제국의 

중기병과 붕보병을 격파합니다. 이후 가장 유명했던 전투로 야르무크 전투에서 4만의 경보병과 

경기병으로 당시 최고의 중보병으로 유명했던 로마군 20만을 격파하게 됩니다. 



4. 한니발


희대의 전략가. 역사에서 수많은 지휘관들이 한니발의 작전을 응용합니다. 

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끌고간 세계 최고의 전략가입니다. 

다시 알프스 행군을 처음으로 해내며 로마 본진에 들어가 완전히 뒤흔들어버립니다. 

한니발은 2만 5천의 군사로 로마군 8만을 상대로 그의 뛰어난 전략으로 대승을 거둡니다.

그의 전술 '망치와 모루' 라는 포위전술은 이후 고대와중세 서양 전술의 교과서가 됩니다.



3.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제가 따로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지구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전략가입니다. 

당시 유럽의 모든 국가는 나폴레옹 이 한사람을 쫓아내기 위해 동맹을 하게 됩니다. 

그의 뛰어난 능력은 이미 잘 알고 계실 테고, 나폴레옹은 자신은 뛰어난 능력을 지녔지만 

그와 반대로 너무나 무능했던 그의 동생과 부관들의 배신, 건강 이상, 러시아 전쟁에서의 패배와 

스페인 전쟁의 부담으로 인해 결국에는 유럽의 연합군에게 패배하게 됩니다. 

여기서 또 유명한 일화가 하나있습니다. 패배후 유배를 갔지만 탈출하여 다시 군대를 모으게 됩니다. 

이때 2천의 군대로 파리에 재입성하여 전투를 하지만 다시 한 번 패배를 합니다. 



2. 알렉사드로스 대제


정복왕으로 유명한 그는 그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로 더욱 유명합니다. 

당시 최강국이었던 페르시아제국을 점령했으며 자신을 얕봤던 티벳를 아예 지구에서 지워버립니다. 

이집트를 지배했었고 인도의 북서부까지 점령하는 등 정복왕으로서 면모를 확실히 보여줍니다. 

페르시아군과의 전투에서는 4만의 병력으로 11만의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다양한 전술을 시도합니다.



1. 수부타이


지구상 최고의 장군으로 몽골 제국의 최강 장군입니다. 

징기스칸의 가장 두터운 신임을 받았었고 당시 32개국 국가를 지도상에서 지워버렸는데

전투의 지우개라고 불러도 되겠습니다. 65번의 전투에서 모두 완승을 거두었으며,

그가 격파했던 지역들을 살펴보면 

중앙아시아의 수십개 국가와 이슬람 국가들, 러시아, 불가리아, 헝가리, 폴란드, 조지아, 아르메니아의

군대를 대파시킨 지구인 중 가장 위대한 육전사령관입니다.





제주도 4.3사건의 배경과 원인


오늘은 제주도 4.3사건에 대해서 글을 적어볼까 합니다 

1948년 4월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으로 무력충동과 진압과정에서 있었던 제주도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입니다. 

이 당시에 희생된 주민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너무나 많은 무고한 주민들도 있었습니다. 

이념의 대립이 가져온 무서운 사건으로 항상 힘 없는 국민들이 희생을 당했던 역사입니다. 



제주도 4.3사건의 발단


독립전까지 제주도는 일본군의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그에 따른 일제의 부역자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군은 철수를 하고 육지로 나갔던 주민 6만 여명이 다시 제주도로 들어오면서 

제주도는 극심한 취업난과 갑작스런 인구의 증가로 식량이 부족하고 전염병이 창궐하며 당시 식량정책 또한 

실패로 돌아가면서 민심은 갈수록 미군정에 반감을 가지게 됩니다. 



주민들은 독립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미군이 들어와서 치안을 담당할 경찰을 해방 전 일제시대 때 일본에 부역했던 

경찰들을 다시 고용했고 이들 중에는 이러한 지위를 이용하여 갖가지 부정과 부패를 저질렀고 주민들은 갈수록 불만이 높아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제주도 4.3사건이 시작되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3.1절 발포사건은 당시 좌파였던 민주주의민족전선이 기념 집회를 열었는데 가두행진을 할 즈음 구경하던 어린아이가 경찰이 탄 말에 

치여 3.1절 발포사건의 발단이 됩니다. 



경찰이 탄 말이 아이를 치고 그냥 가려고 하자 이를 본 군중들은 경찰에게 돌을 던지면 쫓아갔는데....


이 시기에는 주민들이 경찰에 대한 불만이 상당히 높았던 시기입니다. 쫓아오던 주민들을 본 경찰들은 주민들을 

경찰서를 습격하는 단체로 오인하여 비무장한 군중들에게 총을 발포하여 6명 사망, 6명 중상을 입습니다. 


이 사태를 미군정은 수습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시위대의 경찰서 습격사건"으로 매도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 간부와

학생들을 강제 연행하는데 이에 시민들은 경찰에 대한 반감이 더욱 높아졌고 .. 이를 놓치지 않은 남로당은 주민들을 

부추겨 반경활동을 더욱 거세게 진행합니다. 


1948년 4월 3일 

350여 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12개 경찰서를 습격하는 사건을 계기로 6개월 동안 이와 비슷한 유혈사태가 계속되었고,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의 문제를 정부에 대한 반정부 시위로 규정하고 1948년 11월 21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게 됩니다. 


이렇게 강경진압작전이 계속되자 진압대에 의한 주민 사망자와 무장대에 의한 주민의 사망자 수가 계속해서 늘어갔으며

그 사망자 수는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였습니다. 

진압대에 의한 주민은 14000여 명, 무장대에 의한 주민 사망자 수는 1100여 명에 이릅니다. 

사망자 중에는 남녀노소, 임산부까지 할 거 없이 잔인하게 살해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하니... 당시 제주도는 그야말로 지옥이라고 할 수 있었겠습니다.



※ 제주도 4.3사건을 요약해보면..

"서로 다른 이념적 갈등이 극대화 되어 일어난 사건"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해방 후, 미군정의 친일파 등용과 일제시대 일제의 부역자 경찰출신들을 미군정 경찰로 등용합니다. 

밀수품 단속을 빙자한 모리행위, 6만 여명에 이르는 귀한인구의 실직, 경제난, 생필품 부족, 전염병 등 

군정 경찰, 서북 청년단체와 극우 단체들의 횡포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 등이 복합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봅니다. 


요약,

1. 1948년 3울 1일, 경찰은 5.10선거를 반대하는 제주도민들에게 총을 쏜다.

2. 미군정은 이 발포사건을 정당방위로 주장하며 제주도민들을 폭도로 지정.

3. 이후 1948년 4월 3일, 350여 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12개 경찰서를 습격하고 6개월간 유혈사태가이어짐.

4. 1948년 11월 21일 이승만 정부의 제주도 계엄령 선포. (반항하면 총살)

5. 계엄령에 반대하던 주민들이 산으로 들어가 무장대를 조직하여 대항함.


-무장대의 주장-

경찰과 반공청년단체의 탄압에 대한 저항이다. 

남한 단독선거 반대와 조국통일독립을 주장.






무인 전투 로봇 THeMIS ADDER


무인 전투 로봇은 이제 만화나 영화에서만 상상할 수 있는 체계가 아닙니다. 현재 세계적으로 많은 국가들이 이러한 전투 로봇을 개발하고 있는데 하늘의 무인기에 이어서 지상전에서도 병사들을 지원하거나 병사들을 대신해서 전쟁을 하는 날이 머지 않은 미래에 존재할 거 같습니다. 

얼마전 싱가포르에서는 Milrem와 ST Kinetics 사는 

무인 차량(UGB) 형태의 THeMIS ADDER의 첫 야외테스트를 실시하였습니다.

 


이 테스트의 목적은 전장에서 지상군의 화력을 지원하거나 직접 병사들을 대신해서 전장에 투입되어 자율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중인 무인 전투 로봇 THeMIS ADDER입니다. 외관 모습은 작은 탱크나 장갑차처럼 보입니다. 




THeMIS ADDER의 목적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부득이하게 인명피해가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전장에서 

무인 차량에 기관총을 장착한채 작전을 직접 수행하고 아군의 인적 피해를 줄이기 위해 임무를 지원하며

가까운 미래에는 군인대신 로봇으로 대체하기 위한 지속적인 실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양사는 아직 완벽한 자율주행은 가능한 상태가 아니고 머지않아 완벽하게 자율주행을 하며 

임무를 완수 할 수 있도록 연구를 계속 할 것입니다. 지금은 무인 전투 로봇의 안정성과 원격으로 무장한 무기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 테스트를 하는데 집중하였고 이 부분에서는 이번 야외테스트로 인해서 

상당한 발전이 있었음을 증명했습니다. 

참고-http://newatlas.com/themis-adder-weaponized-ugv-live-tests/46749/




전세계적으로 무인 전투 장비에 대한 연구가 지속되는 가운데 이번 테스트는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후 기술 개발이 더 발전한다면 전장에서 사람 VS 사람이 아닌 로봇 VS 로붓의 전쟁을 할 날도 머지 않은 거 같습니다. 



THeMIS ADDER의 제원


무게 750~1000kg

속도 24~35km/h

포탑 360도 회전




419혁명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


최근들어 역사를 돌이켜 보면 저도 모르게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개인 한 사람의 욕심과 부역자들에 의해서 너무나 많은 무고한 국민들이 희생을 강요당하는구나..오늘은 1960년 4월19일에 있었던 419혁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6.25전쟁으로 인해 극도로 나라가 불안정할 때 당시 자유당 이승만 총재는 반공을 내세워 자신의 독재정치를 강화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곧 수많은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게 되는데 이때부터 이미 정치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간첩"이라고 내세우면 뭐든지 되는 시대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2016년 요즘 정치도 마찬가지처럼 보입니다. 간첩조작..)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 앞서 각종 부정과 부패로 대한민국 국민의 대부분의 민심을 잃었던 자유당은 이승만과 이기붕을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서 부정선거를 계획하게 됩니다. 이 부정선거로 인해서 전국에서 많은 국민들이 각 시도에서 부정선거를 비판하는 시위를 하게 됩니다. 



4할 사전 투표와 선거박스 바꿔치기, 선거 참관인을 축출시키는 등.. 부정이 극에 달합니다 

이에 선거 당일 마산의 민주당 간부들은 자유당의 4할 사전 투표는 부정이라며 항의를 하며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부통령의 당선의 무효를 주장하게 됩니다. 


이에 마산 시민들까지 이 시위에 합세하면서 당시 선거 개표장 부근에서 다시 시위를 이어가자 시위가 한참 격해질 무렵, 갑자기 일어난 정전, 그리고 정막을 깨는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바로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서 경찰이 총을 발포하기 시작해서 시위에 참가했던 일반시민 8명이 경찰에 의해서 무참히 살해되고 100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으며 200여 시민들이 경찰에 의해서 연행되면서 시위는 마무리됩니다.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 합심해야 할 때, 개인의 욕심에 눈이 먼 지도자가 이렇게 국민들의 가슴과 나라의 역사에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이 시위가 잠잠해지고 3일이 지난 뒤 신문 지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립니다.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기붕 당선!!




당시에 자유당의 부정부패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이었는지 이 대목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지금 세대에서는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로 어이가 없는 사건입니다. 



이렇게 이승만과 이기붕이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된 후,

4울 11일 마산의 어느 앞바다에서는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바다에 던져진 시위 학생인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이 사건은 이후 경찰에 의한 소행으로 밝혀지자 2만여 명의 신민들은 경ㅊ라서와 시청에 난입하여 격력하게 시위를 하는데

이를 계기로 경찰은 다시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서 무차별 발포!!




이틀이 지나 거리로 마산의 모든 남녀고등학생들이 정권 타도 시위에 나오자 이승만 정부는 급히 특별담화문을 발표하게 됩니다. 


"이 난동에는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도 있어서 지금 조사 중이다."


(최근까지도 이 멘트는 많이 들어본 듯 합니다....그렇게 생각하시면 "공감"에 한표를)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이기붕의 부정선거에 대한 시위운동은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한 운동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하며

고려대학교에서는 4.18 선언문을 발표로 기성세대의 자성과 마산사건의 책임자를 즉시 처단하라고 외쳤고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회 또한 4.19 선언을 발표하며 1960년 4월 19일에 이르러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한 운동은 가장 절정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후 시위대 10만 명 가량이 세종로와 태평로에 모여 경무대로 행진을 하면서 격렬해지자, 경찰은 다시 한 번 시위대를 향해서 총격을 가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 시위에 모였던 시위대와 전국에서 일어났던 시위에서 200여 명 가까운 무고한 시민들이 소중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후에 이승만은 3.15 부정선거를 인정했으며 자신의 부정에 대해서 일부 대책들을 제시했지만 지식층이었던 전국 대학에서 모인 교수들 285명은 부패의 온상인 이승만 정권은 물러나야 한다고 시국선언을 하기에 이르고 희생된 학생들의 피를 보상하라며 다시 한 번 전국적으로 이승만 정권 타도 시위가 이어집니다. 

(최근의 사태와 비슷한 느낌입니다..)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대규모 시위로 번지자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하야 성명을 라디오를 통해서 발표합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성명의 일부입니다> - 1960녀 4월 26일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할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이로써 이승만 대통령은 즉시 하야하게 되고 만장일치로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게 됩니다.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통과하고 대한민국은 최초의 지방선거를 실시하는 등 민주주의로 발전하는 듯 했으나


얼마되지 않은 1961년 5울 16일,, 박정희 대통령이 주축이 되어 군사 정변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것이 516쿠테타...



<구테타에 성공한 직후 박정희 대통령과 군인들>





부마항쟁 .유신정권에 대항하다


국정농단을 일으킨 박근혜 대통령이 어제 날짜로 탄핵이 되었습니다. 

최순실과 그의 부역자들에 의해서 이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부분에서 큰 혼란이 있었고

국민들 마음에도 큰 상처가 생겼습니다. 오늘 이것을 계기로 해서 대한민국이 더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은 과거 정권의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부마항쟁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부마항쟁의 배경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16일, 부산에서 학생들에 의해서 일어난 유신 정권에 대한 민주화 항쟁입니다. 

처음에는 학생들에 의해서 시작이 되었지만 당시 이러한 반유신 정권에 대한 시위는 시민들에게도 호응을 얻어

대규모 반독재 민주 항쟁이 되었습니다. 


당시 부산 지역에서는 10월 16일부터 18일까지 항쟁이 지속되다가 정부의 계엄령으로 계엄군에 의해서 진압이 되었으며,

마산으로 번진 항쟁은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이어졌지만 정부의 위수령 발령으로 군대가 주둔하면서 학생과 시민들의 

민중항쟁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 위수령

군병력의 주둔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지역에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치안과 수비,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2. 부마항쟁의 원인


가장 큰 원인으로는 당시 정치적으로 봤을 때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체제를 들 수 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계속적인 정권 유지를 위해 유신 헌법을 내세우고 1인 독재체제를 유지합니다. 이것에 반대 또는 비판하는 

분위기가 일어나고 경제적으로도 이미 실패한 정책으로 국민의 반감을 사게 됩니다. 

이에 유신 체제를 반대하는 정치가와 학생들, 시민들을 "긴급조치"의 미명하에 계속적인 탄압을 하게 됩니다.


*긴급조치란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2년 제정한 유신헌법 53조를 바탕으로 1~9호까지 발령됐다.

박정희 정권은 법률적 효력을 부여한 긴급조치를 통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정지시키고 군사독재를 강화했다. 

1974년 1월 8일 선포된 긴급조치 1호는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비방하는 행위와 이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타인에게 알리는 언동을 금지했다. 

긴급조치 2호는 깁급조치 위반 사건을 일반법원이 아닌 군법회의에서 재판하도록 했다. 

1974년 이후 긴급조치 1.3.4.9호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은 사람만 589개 사건에 140명에 이른다. 

9호까지 발동된 긴급조치는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 전대통령이 사망하고 신군부의 주도로 1980년 10월27일 

헌법이 개정되면서 폐지됐다. [출처-다음백과사전]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헌법상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한 유신헌법의 개정에 대한 저항운동이 사회 각계각층에서 일어납니다. 

하지만 유신정부는 이러한 민주주의 우동을 강력하게 탄압하게 되는데

대통령이 발동한 "긴급조치"라는 구호 아래 국민과 정치가, 학생들의 인권을 박탈, 억압합니다. 



다음으로 경제적 측면에서 당시의 상황을 바라보면 중화학 공업 정책은 세계적인 불황과 함께 무리한 투자와 정책으로

이미 경제는 심각한 상태에 빠진 모습입니다. 

부마항쟁은 이러한 정치, 경제, 사회적 요인에 의해서 부산의 부산대학교의 학생들 시위로 시작하게 됩니다. 

시위가 급격하게 확대됨으로 인해서 당시 정부에서는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합니다. 

탱크와 장갑차, 그리고 시내에서는 공수부대가 착검까지 하는 상황으로 시민들이 도로변으로 한 발짝이라고 나오게 되면

개머리판과 곤봉으로 사정없이 구타하여 당시 머리부분을 다친 시민들의 수가 1000여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무죄한 시민들과 학생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에 다쳤을까요?


이렇게 부산 지역은 계엄군에 의해서 10월 18일 항쟁이 진압되었고 마산으로 번진 항쟁은 18일 부터 20일까지 

경남대학교 학생들에 의해서 격렬하게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유신 정부는 마산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다시 군대에 의해 시민과 학생들의 민주항쟁을 강제 진압하게 됩니다. 



이렇게 부마항쟁은 끝이나게 되는데 결과적으로는 유신 독재정권의 막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유신 정권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학생과 시민들의 힘을 받아 이루어졌고 국민의 염원이 표출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로써 부마항쟁은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10.26 정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1026사태 [김재규 최후진술, 재평가]


계속되는 국정조사에서 우리 국민의 마음이 얼마나 참담하고 아픈지 지금 이 나라의 정치인들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집권 권력에 의해 잘못된 역사를 우리 세대뿐 아니라 다음 세대, 후손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올바른 역사를 알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탐구왕은 1026사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026사태란 


1970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에 의해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했던 사건을 말합니다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잠시 살펴보면,

유신 체제에서 무리하게 진행된 투자로 인해서 한국경제는 북한보다 더 어렵다고 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유신 체제하의 한국의 인권상황은 국외에서 볼 때 심각한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핼맹국인 미국의 당시 카터 행정부와 박정희 유신정부는 불화가 생기게 됩니다. 


당시에 이러한 상황은 경제가 북한보다 어려운 상황에서 제2의 전쟁이나 이와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다시 수 많은 국민들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참고글 보시면 당시의 한국의 정치, 경제적 상황을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됩다.



한국은 사회 곳곳에서 진행된 유신헌법 개정에 대한 저항과 운동이 일어납니다. 

이에 박정희 독재 정권은 더욱 잔인하게 이들을 강제 탄압하게 되는데...

"긴급조치"라는 구호 아래 대통령은 이 조치를 발동하면서 우리 국민이 헌법 상 누려야할

가장 기본적인 "헌법상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유신 정부는 긴급조치를 이용하여 각계각층에서 일어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국민과 정치가들, 학생운동가들을 탄압합니다. 



이후 유신 정부에 대한 정치가와 국민들, 학생들의 불만이 극에 달하여 드디어 10월 16일 부산에서 

학생 5000여 명이 시위를 일으키게 되는데 이는 곧 경남의 창원과 마산으로 불같이 확산됩니다. 

[부마항쟁]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독재 정권은 10울 20일에 창원과 마산에 위수령을 발동하여 

시위자 500여 명을 연행했으며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위수령


군병력의 주둔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지역에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치안과 수비,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부마사태가 원인이 되어 1026사태가 일어나는 계기를 마련해줍니다. 



당시 1970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는 부마사태에 대한 수습으로 

토론이 있었는데 강경 수습을 주장했던 경호실장 차지철과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 사이에서는 

이 부마사태 수습에 대해서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결국에 차지철과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을 하고 박정희의 18년 독재가 끝나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20년 앞당겨지게 되는듯했습니다. 


하지만 

정부의 중심이 없는 사이 군부에서는 이 상황을 다시 먹잇감으로만 생각하게 됩니다.

이 부분의 이야기는 잠시 후에 설명드리도록 하고,


오늘날 김재규가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많습니다. 

저 역시 최근에야 이러한 부분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김재규 보통군법회의 최후진술(1979.12.18)◆ 



동영상은 김재규 최후진술의 내용입니다. 

당시 재판관은 김재규에게 마지막으로 진술을 허용합니다.




동영상 내용중 2가지를 글로써 올려보겠습니다. 


1. 혁명의 목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입니다


"저의 10울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둘째가 이 나라가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세째가 우리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째가 혈맹인 우방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입니다.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혈맹의 우방으로서의 관계를 회복하고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 국익을 도모하자는데 있었습니다.

다섯째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와 국민과 국가가 국제사회에서도 명예를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위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목적은 10월 26일 혁명 결행 성공과 더불어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었습니다. 

해결이 보장되었습니다."



2. 김재규 그는 혁명 이후의 대한민국에 대한 걱정 어린 말도 합니다. 


"또 나는 생각합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 핵심이 없습니다. 

대통령 각하가 돌아가신 이후에 핵심이 빠져버렸습니다. 중심 세력이 없습니다. 

이런 상태가 가장 위험한 상태입니다. 


4.19이후에 사태나 마찬가지입니다. 주인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유민주주의가 출범하게 되면은 

센 놈이 와서 밀면 또 넘어갑니다. 악순환이 또 계속됩니다. 


이것을 막는 것은 저는 오로지 민주 회복을 기도한 저만이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군의 주요 지휘관들과 같이 협력해서 자유민주주의를 출발시켜 놓고 이것을 보호해내는데 

내 역할이 있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또,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에 건국 이래 지금까지 한 번도 대통령이나 정권이 순리적인 방법으로 

오고 갔던 일이 없었습니다. 

요번만 해도 그렇습니다만은, 지금까지의 경우가 4.19 혁명, 5.16혁명 이런 악순환이 거듭하는 

이러한 상태를 언제까지 가져가야 하겠습니까?

나는 군의 수뇌부들과 같이 손을 잡고, 이 나라의 정권이 앞으로는 국민의 뜻에 따라가지고 순리적으로 

오고 가고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토착화시켜야겠다, 그것이 내가 할 일이다.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단 한 번이라도 그렇게 만들어 놓으면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는 그다음부터는 

대통령이 바뀌던지 정권이 바뀌던지 국민의 뜻에 따라가지고 순리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해야 될 일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김재규가 마지막으로 한 말입니다.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


이후,


그의 걱정대로 박정희가 사망한 이후 대한민국 정권은 공백 상태로 머물게 됩니다. 

이를 가장 먼저 포착한 것이 당시 보안사령관으로 있던 전두환입니다. 


전두환과 노태우 등이 포함된 신군부세력은 당시 육군참모총장과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총장을 

강제로 연행하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최규하에게 승인을 얻어 1212사태가 일어납니다.

대한민국은 다시 신군부세력에 의해 민주주의는 꽃을 피우지 못하게 됩니다. 


 

재미있게 읽으셨으면  공감 부탁드립니다^^;




김기춘의 10월 유신 [유신헌법, 유신체제]


오늘 국정조사 중에서 질문에 대한 김기춘의 답변 중 거의 대부분을 모르쇠로 일관되게 

이야기 하는 모습을 보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분노할 수 밖에 없었던 거 같습니다.

이번 국정에서는 반드시 과거의 치욕들과 부조리, 비리들을 모두 밝힐 수 있길 기도합니다. 


김기춘은 유신헌법을 만든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유신헌법과 유신체제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 유신체제


1972년 10월 17일에 당시 대통령인 박정희는 장기집권(영구집권)을 목적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뭉개버립니다. 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없애버리고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한 유신 헌법을 제정합니다. 


이는 당시 경기 불황이 지속되고 야권의 기세가 높아감에 따라 위기의식을 느낀

박정희가 안보를 내세우며 경제성장을 이룩하자는 미명하에 당시 국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모든 정당과 정치활동을 금지시켜버립니다. 



하지만 군부독제가 독했지만 민주주의를 향한 학생들과 재야 인사들을 중심으로 

박정희 독재 타도 등 유신 헌법의 개정을 위해서 다양한 저항과 운동이 일어나고 

박정희 독재 정권은 이를 강력하고 잔인하게 탄압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에 꾸준히 유신 헌법 개정을 위한 운동이 진행되었으며, 부마항쟁이 일어나게 되며

10.26 박정희가 피살되는 1026사태가 일어나 그의 독재정권은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2. 유신헌법의 특징


1. 민족의 평화통일이념을 규정합니다. 

2. 법률유보조항을 만들어 국민 기본권을 축소시킵니다. 

3.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에 의해서 국회의원 1/3을 선출합니다. 

4. 긴급조치권국회해산권 등 대통령에게 초헌법적 권한을 부여했으며

   대통령 임기 6년 연장과 중임제한조항 철폐로 대통령의 권력이 막강해졌습니다.

5. 정당국가적 경향을 완화시킴

6. 국회의 회기를 단축시켰으며 국회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켰습니다. 

7. 사법적 헌법보장기관인 헌법재판소를 정치적 헌법보장기관인 헌법위원회로 변경

8. 대통령 선거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실시했으며 법관은 대통령이 임명하게 됩니다.

9. 헌법개정절차를 이완시키고 지방의회를 통일이 될 때까지 구성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결론은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해서 헌법까지 뜯어 고치게 됩니다. 



※ 당시 유신체제를 선포하면서 박정희가 한 뻔뻔한 말말말입니다.


"이번 비상조치는 결코 한낱 정권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국권을 수호하고 사상과 이념을 초월한 성실한 대화를 통해 전쟁 재발의 위험을 미연에 막고

나아가서는 5천만 민족의 영광스러운 통일과 중흥을 이룩하려는 

실로 우리 민족의 운명과도 직결되는 불가피한 조치라고 확신한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다시 더욱 악랄한 독재체제를 맞이하게 됩니다. 

당시에 박정희 유신체제를 비판 또는 비난했던 사람들은 엄중하게 다스려졌습니다.


구속되어 형을 산 분들 중에는 10년형을 선고받은 사람도 있을 정도로 

박정희 대통령은 신적인 존재였습니다. 지금 현재에도 사회적 이슈에서 

집권 여당을 몰아붙히거나 비판, 비난을 하면 빨갱이로 모는 건 어쩌면 당시에 

유신체제하에서 유신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정치인이건 개인이건 언론이건 

모두 빨갱이로 몰아 붙였던 영향이 남아 있어서 그런게 아닐까 생각이 되네요.....


이 부분에서 다시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김기춘...

유신헌법을 만든 사람이며 현재 국정조사에서 모르쇠로 일관하는 분이기도 하죠....




아직도 세월호 어딘가에는

찾아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 긴급조치란?

유신헌법에 규정되어 있던 대통령 권한으로 내릴 수 있는 특별조치를 말한다. 

대통령은 이 조치를 발동함으로써 '헌법상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다.

유신정부는 긴급조치를 이용하여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학생운동과 국민을 탄압하였다.


★우리나라를 잘 살게 만든 사람은 박정희가 아니라

"최악의 조건에서도 구슬땀을 흘리며 일한 국민들이다"







동행명령장이란 [최순실 청문회 출석지시]


2016년 12월 7일

최순실 국정농단의 주역들인 최순실을 비롯하여 우병우 등 핵심 혐의자들 10여명에게 

7일 오후 2시까지 청문회장에 출석을 지시하는 동행명령장을 발부했습니다. 



여기서 동행명령장이란 무엇이며 어떤 법적 효력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동행명령장 


최순실 외 현재 대한민국을 패닉상태에 빠뜨린 국정농단의 주역들 10여 명에게 

동행명령장이 발부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동행명령장이 무엇인지 법적 효력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 하시는데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국회에서 증언 및 감정 등에 관한 법률' 제6조에 근거하여 

국정조사나 국정감사의 증인 또는

참고인이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을 거부하는 경우, 

증인과 참고인을 동행하도록 명령하는 제도입니다. 


국회 소관의 상임위원회의 의결로 위원장이 동행명령장을 발부합니다. 

이 동행명령장의 집행은 국회 사무처 공무원이 하도록 되어 있으나


최순실 등 현재 교도소 또는 구치소에 수감된 증인에 대한 동행명령장은

교도관이 발부 권한을 위임받아서 이를 행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동행명령장을 증인이 거부하면?


동행명령장을 받은 증인은 이유없이 이를 거부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합니다.



※국회에서 동행명령장 발부된 사건 모음


1988년 구정 감사 시 건교위에서 증인 출석을 거부한 이모씨에게 발부

2001년 11월 "동방 금고 불법 대출 사건" 관련하여 국정감사 증언 위해 발부

2003년 10월 몰래카메라 사건 과련 검사 2명에게 발부

2012년 국정 감사에 불참한 김재철 MBC 사장에 발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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