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조선일보


미국의 은성훈장은 미국정부가 외국군에게 주는 최고의 무공훈장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 해군의 첩보부대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는데, 당시 맥아더 장군은 이 부대의 활약을 미국 정부에 알려 한국 해군의 우수성을 다시 한 번 입증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해군 최초의 북한 응징보복작전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X-RAY 작전을 직접 지휘한 해군 첩보부대 소령이었던 그가 지금까지 해군의 전설로 불리는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수학교사가 꿈인 청년이 해군 제독이 되다


평양에서 태어난 함명수 제독은 어려서부터 수학교사가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자 군인의 길을 선택하고 해군병학교 1기로 입교하면서 군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 입교 후 미 해군의 구축함을 거쳐 1946년 12월에 소위로 임관하여 충무공정에 중위까지 근무하던 중 대위로 진급하자 그를 눈여겨봤던 김성삼 사령관에 의해 통제부 정보과장으로 임명되어 영웅적인 길에 한 발 내딛는 계기가 됩니다.


이미지-국방홍보원



한국 해군 최초의 대북 응징, 몽금포작전


광복 이후 혼란한 시기를 틈타 북한은 끊임없이 도발을 일삼아 왔습니다. 그러던 중 1949년 5월 11일 항해 중이던 508정이 납북되고, 같은 해 8월 10일 서해에서 주한민군 군사고문단장의 전용 보트가 납북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시기에는 북한의 대남 도발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의 승인하에 해군 함정 5척과 함명수 소령의 지휘 아래 특공대 20명을 보내 북한 경비정 4척을 침몰시키고, 1척 나포, 북한군 120여 명 사살, 포로 5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작전에 투입된 충무공함


당시 작전에 투입되었던 5척의 함정은 충무공함, 대전정, 통영점, 단천정, 광주정이 참가하였고, 함명수 소령이 지휘하는 20명의 특공대를 엄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함명수 소령과 특공대원들은 5척의 고무보트에 몸을 싣고 몽금포항으로 들어가지만 이내 북한군에게 발각되고 적 해안경비병들과 함정의 집중포화를 받게 됩니다. 이때 4척의 고무보트가 고장이 나서 고립되지만 함명수 소령이 탑승한 고무보트는 그대로 항내로 돌진하는데, 이 과정에서 함 소령은 왼쪽 허벅지 관통상과 오른쪽 무릎뼈가 깨지는 중상을 입게 되죠. 



하지만 상황을 멀리서 지켜보던 그의 해사 동기이면서 같이 작전에 나갔던 통영함 정장 공정식 소령이 통영함의 37미리 대전차포를 잡고 함 소령과 특공대를 구하기 위해 몽금포항으로 돌진하여 함 소령을 구하고 다시 재차 공격해서 큰 공을 세우게 됩니다. 





공격조 5대의 보트 중 4대가 고장이 나서 이미 작전이 실패하는 상황이었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적진으로 뛰어든 함명수 소령과 그를 구하고 적을 물리친 공정식 소령의 작전은 대한민국 건군 이래 최초의 북한 응징 작전이면서 적의 도발 원점을 타격한 작전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17인의 특공대


함명수 소령은 몽금포 작전에서 당한 관통상으로 왼쪽 다리 절단 판정을 받지만 미 해군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신경치료와 함께 재활치료를 받고 있는 중에

1950년, 북한군은 총 공세를 펴면서 낙동강 전선에는 한국전쟁의 사활이 걸린 전투가 연일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극동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세우게 되는데 이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진이 투입해 적의 해안포 정보와, 병력 배치, 주변 환경 등의 고급 정보는 필수였습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 해군첩보대 대장 역의 이정재


1950년 8월, 함명수 소령과 함께 17인의 특공대(해군첩보부대)는 부산항을 출발해 인천에 잠입해 첩보활동을 시작합니다. 

인천과 수원 등에서 활동하며 적의 병력과 이동 현황, 해안포 위치, 보급선 현황, 기뢰 매설 지역, 상륙 지점 지형 등 상세한 정보를 취합해서 사령부에 보고하게 됩니다. 


▼인천 상륙작전지도


그리고 1950년 9월 13일, 첩보부대에 드디어 철수 명령이 떨어집니다. 이는 곧 인천상륙작전이 임박했다는 것을 암시했었죠.

첩보부대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부대원 6명이 남아 일을 처리하는 중 북한군의 기습이 있었는데 이때가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기 하루 전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6명 중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하사가 적을 유인한 사이 4명의 대원은 탈출에 성공했고, 남아서 북한군과 싸우던 임병래와 홍병조는 전투 중에 북한군의 포로로 잡히면 고문에 의해서 인천상륙작전의 내용을 발설할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권총 자결을 선택합니다.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하사

이렇게 이들의 희생과 활약으로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하였고, 낙동강을 기점으로 넓게 포위하고 있었던 북한군의 허리를 끊어 보름 만에 서울을 수복하는 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몽금포 작전에서의 부상이 회복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작전을 지휘했던 첩보부대장 함명수 소령과 끝까지 목숨을 바쳐 임무를 완수했던 이병래 중위, 홍시욱 하사, 그리고 섬주민 모두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故 함명수 제7대 해군참모총장과 해군참모총장 재임 당시 사진


함명수 소령과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하사에게 미국 정부가 외국군에게 부여하는 최고의 무공훈장인 은성훈장을 수여했으며, 함명수 소령은 이후 대한민국 해군의 제7대 참모총장이 됩니다. 전장에서는 임무를 위해 절대 물러섬이 없었던 최고의 군인이었고, 평생 청렴한 생활로 살아온 그는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해군의 존경을 받고 있는 한국 해군의 전설로 불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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