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사태,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바꿔놓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노태우 등의 신군부세력에 의한 군사반란!!


1212사태가 일어난 원인으로는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후 

전두환, 노태우 등이 포함된 신군부세력이 군부 내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육군참모총장이며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연행하고

당시의 대통력이었던 최규하를 협박해서 이를 승인 받으면서 일어났습니다. 



10.26사건이 일어나 박정희가 암살된 후, 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양측은 

주도권 장악을 위해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 때 전두환을 중심으로한 신군부세력은 정승화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에게

돈을 받았다고 주장을 하면서 정승화를 강제로 연행합니다.



그리고 정승화의 연행에 대해서 저항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부 육군장성들은 

이미 신군부세력의 계획에 의해서 요정에 초대되어 있는 상화으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연행이 되었지만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지휘할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이러한 모든 사건은 대통령인 최규하의 허락이 없었기 때문에 명분이 없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군부는 최규하 대통령에게 계속된 압력을 가하면서 정승화 연행을 요청하나

거절당하자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노재현을 체포하고 노재현을 압박하여 

결국엔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연행을 승낙받게 됩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증언


이희성은 12.12 반란 이후, 전두환이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한 인물입니다. 


<증언내용>


당시 전두환이 확실히 잘못을 했습니다 .

계급이 낮은 소장이 참모총장을 연행한다는 것은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야 합니다. 

이에 국방부장관 노재현에게 승인 받으려 했으나 노재현 이 분도 호락호락한 분이 아닙였습니다.


다급해진 전두환과 신군부세력은 하극상을 하게 됩니다.

전두환은 정승화 총장이 당시 김재규에게 돈을 받았다고 했으나 절대 그런 인품을 가진 

사람이 아님에도 전두환 개인의 야심 때문에 연행되고 맙니다.



여기서 또 하나,

당시 군부의 세력다툼에 대해서 잠깐 알아보겠습니다.


전두환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사이의 갈등이 커진 계기는  

4년제 육군사관학교 11기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전두환 중심의 "하나회"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의 권력 싸움 때문이었다.


후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연행되어 군재판에 회부되어 보충역 육군 이등병으로 

강제예편 되어 징역 7년을 선고 받은 후 복역하다가 1980년 6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됩니다.

이후 시간이 흐른뒤, 1997년 무죄를 선고 받았으며 2002년에 운명하게 됩니다. 



이렇게 전두환과 신군부세력, 하나회 위주의 권력장악이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 더 깊게 이야기를 하면 


당시에 군부세력이 정권을 잡으려는 모습이 포착되면서 학생들이 5월 중수부터

대규모 시위를 하게 되는데 이에 전두환 체제의 신군부는 5.17쿠테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

전국 비상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그 다음날인 5.18일에 광주에서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되지만 계엄군을 투입해

무자비하게 학생과 시민들을 탄압하여 진압하게 됩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보안사 5인방인 이학봉, 허화평, 정도영, 권정달, 허삼수



이렇게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진압된 후, 5월 24일에는 박정희 피살 관련자와 김재규를 처형하고

최규하 대통령은 사임하게 됩니다. 이후 전두환은 육군 대장으로 예편을 한 후 

대한민국 제11대, 12대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1988년 2월) 



이후 노태우 역시 대통령에 취임을 했지만 김영삼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그동안 정당화 되었던 1212사태는 하극상에 의한 국가 전복 사태로 규정을 짓고

주범인 전두환과 노태우는 1995년 구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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