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사태 [김재규 최후진술, 재평가]


계속되는 국정조사에서 우리 국민의 마음이 얼마나 참담하고 아픈지 지금 이 나라의 정치인들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집권 권력에 의해 잘못된 역사를 우리 세대뿐 아니라 다음 세대, 후손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올바른 역사를 알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탐구왕은 1026사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026사태란 


1970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에 의해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했던 사건을 말합니다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잠시 살펴보면,

유신 체제에서 무리하게 진행된 투자로 인해서 한국경제는 북한보다 더 어렵다고 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유신 체제하의 한국의 인권상황은 국외에서 볼 때 심각한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핼맹국인 미국의 당시 카터 행정부와 박정희 유신정부는 불화가 생기게 됩니다. 


당시에 이러한 상황은 경제가 북한보다 어려운 상황에서 제2의 전쟁이나 이와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다시 수 많은 국민들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참고글 보시면 당시의 한국의 정치, 경제적 상황을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됩다.



한국은 사회 곳곳에서 진행된 유신헌법 개정에 대한 저항과 운동이 일어납니다. 

이에 박정희 독재 정권은 더욱 잔인하게 이들을 강제 탄압하게 되는데...

"긴급조치"라는 구호 아래 대통령은 이 조치를 발동하면서 우리 국민이 헌법 상 누려야할

가장 기본적인 "헌법상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유신 정부는 긴급조치를 이용하여 각계각층에서 일어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국민과 정치가들, 학생운동가들을 탄압합니다. 



이후 유신 정부에 대한 정치가와 국민들, 학생들의 불만이 극에 달하여 드디어 10월 16일 부산에서 

학생 5000여 명이 시위를 일으키게 되는데 이는 곧 경남의 창원과 마산으로 불같이 확산됩니다. 

[부마항쟁]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독재 정권은 10울 20일에 창원과 마산에 위수령을 발동하여 

시위자 500여 명을 연행했으며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위수령


군병력의 주둔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지역에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치안과 수비,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부마사태가 원인이 되어 1026사태가 일어나는 계기를 마련해줍니다. 



당시 1970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는 부마사태에 대한 수습으로 

토론이 있었는데 강경 수습을 주장했던 경호실장 차지철과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 사이에서는 

이 부마사태 수습에 대해서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결국에 차지철과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을 하고 박정희의 18년 독재가 끝나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20년 앞당겨지게 되는듯했습니다. 


하지만 

정부의 중심이 없는 사이 군부에서는 이 상황을 다시 먹잇감으로만 생각하게 됩니다.

이 부분의 이야기는 잠시 후에 설명드리도록 하고,


오늘날 김재규가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많습니다. 

저 역시 최근에야 이러한 부분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김재규 보통군법회의 최후진술(1979.12.18)◆ 



동영상은 김재규 최후진술의 내용입니다. 

당시 재판관은 김재규에게 마지막으로 진술을 허용합니다.




동영상 내용중 2가지를 글로써 올려보겠습니다. 


1. 혁명의 목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입니다


"저의 10울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둘째가 이 나라가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세째가 우리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째가 혈맹인 우방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입니다.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혈맹의 우방으로서의 관계를 회복하고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 국익을 도모하자는데 있었습니다.

다섯째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와 국민과 국가가 국제사회에서도 명예를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위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목적은 10월 26일 혁명 결행 성공과 더불어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었습니다. 

해결이 보장되었습니다."



2. 김재규 그는 혁명 이후의 대한민국에 대한 걱정 어린 말도 합니다. 


"또 나는 생각합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 핵심이 없습니다. 

대통령 각하가 돌아가신 이후에 핵심이 빠져버렸습니다. 중심 세력이 없습니다. 

이런 상태가 가장 위험한 상태입니다. 


4.19이후에 사태나 마찬가지입니다. 주인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유민주주의가 출범하게 되면은 

센 놈이 와서 밀면 또 넘어갑니다. 악순환이 또 계속됩니다. 


이것을 막는 것은 저는 오로지 민주 회복을 기도한 저만이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군의 주요 지휘관들과 같이 협력해서 자유민주주의를 출발시켜 놓고 이것을 보호해내는데 

내 역할이 있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또,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에 건국 이래 지금까지 한 번도 대통령이나 정권이 순리적인 방법으로 

오고 갔던 일이 없었습니다. 

요번만 해도 그렇습니다만은, 지금까지의 경우가 4.19 혁명, 5.16혁명 이런 악순환이 거듭하는 

이러한 상태를 언제까지 가져가야 하겠습니까?

나는 군의 수뇌부들과 같이 손을 잡고, 이 나라의 정권이 앞으로는 국민의 뜻에 따라가지고 순리적으로 

오고 가고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토착화시켜야겠다, 그것이 내가 할 일이다.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단 한 번이라도 그렇게 만들어 놓으면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는 그다음부터는 

대통령이 바뀌던지 정권이 바뀌던지 국민의 뜻에 따라가지고 순리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해야 될 일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김재규가 마지막으로 한 말입니다.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


이후,


그의 걱정대로 박정희가 사망한 이후 대한민국 정권은 공백 상태로 머물게 됩니다. 

이를 가장 먼저 포착한 것이 당시 보안사령관으로 있던 전두환입니다. 


전두환과 노태우 등이 포함된 신군부세력은 당시 육군참모총장과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총장을 

강제로 연행하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최규하에게 승인을 얻어 1212사태가 일어납니다.

대한민국은 다시 신군부세력에 의해 민주주의는 꽃을 피우지 못하게 됩니다. 


 

재미있게 읽으셨으면  공감 부탁드립니다^^;




1212사태,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바꿔놓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노태우 등의 신군부세력에 의한 군사반란!!


1212사태가 일어난 원인으로는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후 

전두환, 노태우 등이 포함된 신군부세력이 군부 내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육군참모총장이며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연행하고

당시의 대통력이었던 최규하를 협박해서 이를 승인 받으면서 일어났습니다. 



10.26사건이 일어나 박정희가 암살된 후, 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양측은 

주도권 장악을 위해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 때 전두환을 중심으로한 신군부세력은 정승화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에게

돈을 받았다고 주장을 하면서 정승화를 강제로 연행합니다.



그리고 정승화의 연행에 대해서 저항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부 육군장성들은 

이미 신군부세력의 계획에 의해서 요정에 초대되어 있는 상화으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연행이 되었지만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지휘할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이러한 모든 사건은 대통령인 최규하의 허락이 없었기 때문에 명분이 없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군부는 최규하 대통령에게 계속된 압력을 가하면서 정승화 연행을 요청하나

거절당하자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노재현을 체포하고 노재현을 압박하여 

결국엔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연행을 승낙받게 됩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증언


이희성은 12.12 반란 이후, 전두환이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한 인물입니다. 


<증언내용>


당시 전두환이 확실히 잘못을 했습니다 .

계급이 낮은 소장이 참모총장을 연행한다는 것은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야 합니다. 

이에 국방부장관 노재현에게 승인 받으려 했으나 노재현 이 분도 호락호락한 분이 아닙였습니다.


다급해진 전두환과 신군부세력은 하극상을 하게 됩니다.

전두환은 정승화 총장이 당시 김재규에게 돈을 받았다고 했으나 절대 그런 인품을 가진 

사람이 아님에도 전두환 개인의 야심 때문에 연행되고 맙니다.



여기서 또 하나,

당시 군부의 세력다툼에 대해서 잠깐 알아보겠습니다.


전두환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사이의 갈등이 커진 계기는  

4년제 육군사관학교 11기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전두환 중심의 "하나회"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의 권력 싸움 때문이었다.


후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연행되어 군재판에 회부되어 보충역 육군 이등병으로 

강제예편 되어 징역 7년을 선고 받은 후 복역하다가 1980년 6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됩니다.

이후 시간이 흐른뒤, 1997년 무죄를 선고 받았으며 2002년에 운명하게 됩니다. 



이렇게 전두환과 신군부세력, 하나회 위주의 권력장악이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 더 깊게 이야기를 하면 


당시에 군부세력이 정권을 잡으려는 모습이 포착되면서 학생들이 5월 중수부터

대규모 시위를 하게 되는데 이에 전두환 체제의 신군부는 5.17쿠테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

전국 비상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그 다음날인 5.18일에 광주에서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되지만 계엄군을 투입해

무자비하게 학생과 시민들을 탄압하여 진압하게 됩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보안사 5인방인 이학봉, 허화평, 정도영, 권정달, 허삼수



이렇게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진압된 후, 5월 24일에는 박정희 피살 관련자와 김재규를 처형하고

최규하 대통령은 사임하게 됩니다. 이후 전두환은 육군 대장으로 예편을 한 후 

대한민국 제11대, 12대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1988년 2월) 



이후 노태우 역시 대통령에 취임을 했지만 김영삼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그동안 정당화 되었던 1212사태는 하극상에 의한 국가 전복 사태로 규정을 짓고

주범인 전두환과 노태우는 1995년 구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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