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


최근들어 역사를 돌이켜 보면 저도 모르게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개인 한 사람의 욕심과 부역자들에 의해서 너무나 많은 무고한 국민들이 희생을 강요당하는구나..오늘은 1960년 4월19일에 있었던 419혁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6.25전쟁으로 인해 극도로 나라가 불안정할 때 당시 자유당 이승만 총재는 반공을 내세워 자신의 독재정치를 강화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곧 수많은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게 되는데 이때부터 이미 정치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간첩"이라고 내세우면 뭐든지 되는 시대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2016년 요즘 정치도 마찬가지처럼 보입니다. 간첩조작..)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 앞서 각종 부정과 부패로 대한민국 국민의 대부분의 민심을 잃었던 자유당은 이승만과 이기붕을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서 부정선거를 계획하게 됩니다. 이 부정선거로 인해서 전국에서 많은 국민들이 각 시도에서 부정선거를 비판하는 시위를 하게 됩니다. 



4할 사전 투표와 선거박스 바꿔치기, 선거 참관인을 축출시키는 등.. 부정이 극에 달합니다 

이에 선거 당일 마산의 민주당 간부들은 자유당의 4할 사전 투표는 부정이라며 항의를 하며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부통령의 당선의 무효를 주장하게 됩니다. 


이에 마산 시민들까지 이 시위에 합세하면서 당시 선거 개표장 부근에서 다시 시위를 이어가자 시위가 한참 격해질 무렵, 갑자기 일어난 정전, 그리고 정막을 깨는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바로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서 경찰이 총을 발포하기 시작해서 시위에 참가했던 일반시민 8명이 경찰에 의해서 무참히 살해되고 100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으며 200여 시민들이 경찰에 의해서 연행되면서 시위는 마무리됩니다.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 합심해야 할 때, 개인의 욕심에 눈이 먼 지도자가 이렇게 국민들의 가슴과 나라의 역사에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이 시위가 잠잠해지고 3일이 지난 뒤 신문 지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립니다.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기붕 당선!!




당시에 자유당의 부정부패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이었는지 이 대목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지금 세대에서는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로 어이가 없는 사건입니다. 



이렇게 이승만과 이기붕이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된 후,

4울 11일 마산의 어느 앞바다에서는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바다에 던져진 시위 학생인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이 사건은 이후 경찰에 의한 소행으로 밝혀지자 2만여 명의 신민들은 경ㅊ라서와 시청에 난입하여 격력하게 시위를 하는데

이를 계기로 경찰은 다시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서 무차별 발포!!




이틀이 지나 거리로 마산의 모든 남녀고등학생들이 정권 타도 시위에 나오자 이승만 정부는 급히 특별담화문을 발표하게 됩니다. 


"이 난동에는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도 있어서 지금 조사 중이다."


(최근까지도 이 멘트는 많이 들어본 듯 합니다....그렇게 생각하시면 "공감"에 한표를)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이기붕의 부정선거에 대한 시위운동은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한 운동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하며

고려대학교에서는 4.18 선언문을 발표로 기성세대의 자성과 마산사건의 책임자를 즉시 처단하라고 외쳤고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회 또한 4.19 선언을 발표하며 1960년 4월 19일에 이르러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한 운동은 가장 절정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후 시위대 10만 명 가량이 세종로와 태평로에 모여 경무대로 행진을 하면서 격렬해지자, 경찰은 다시 한 번 시위대를 향해서 총격을 가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 시위에 모였던 시위대와 전국에서 일어났던 시위에서 200여 명 가까운 무고한 시민들이 소중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후에 이승만은 3.15 부정선거를 인정했으며 자신의 부정에 대해서 일부 대책들을 제시했지만 지식층이었던 전국 대학에서 모인 교수들 285명은 부패의 온상인 이승만 정권은 물러나야 한다고 시국선언을 하기에 이르고 희생된 학생들의 피를 보상하라며 다시 한 번 전국적으로 이승만 정권 타도 시위가 이어집니다. 

(최근의 사태와 비슷한 느낌입니다..)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대규모 시위로 번지자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하야 성명을 라디오를 통해서 발표합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성명의 일부입니다> - 1960녀 4월 26일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할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이로써 이승만 대통령은 즉시 하야하게 되고 만장일치로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게 됩니다.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통과하고 대한민국은 최초의 지방선거를 실시하는 등 민주주의로 발전하는 듯 했으나


얼마되지 않은 1961년 5울 16일,, 박정희 대통령이 주축이 되어 군사 정변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것이 516쿠테타...



<구테타에 성공한 직후 박정희 대통령과 군인들>





부마항쟁 .유신정권에 대항하다


국정농단을 일으킨 박근혜 대통령이 어제 날짜로 탄핵이 되었습니다. 

최순실과 그의 부역자들에 의해서 이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부분에서 큰 혼란이 있었고

국민들 마음에도 큰 상처가 생겼습니다. 오늘 이것을 계기로 해서 대한민국이 더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은 과거 정권의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부마항쟁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부마항쟁의 배경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16일, 부산에서 학생들에 의해서 일어난 유신 정권에 대한 민주화 항쟁입니다. 

처음에는 학생들에 의해서 시작이 되었지만 당시 이러한 반유신 정권에 대한 시위는 시민들에게도 호응을 얻어

대규모 반독재 민주 항쟁이 되었습니다. 


당시 부산 지역에서는 10월 16일부터 18일까지 항쟁이 지속되다가 정부의 계엄령으로 계엄군에 의해서 진압이 되었으며,

마산으로 번진 항쟁은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이어졌지만 정부의 위수령 발령으로 군대가 주둔하면서 학생과 시민들의 

민중항쟁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 위수령

군병력의 주둔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지역에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치안과 수비,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2. 부마항쟁의 원인


가장 큰 원인으로는 당시 정치적으로 봤을 때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체제를 들 수 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계속적인 정권 유지를 위해 유신 헌법을 내세우고 1인 독재체제를 유지합니다. 이것에 반대 또는 비판하는 

분위기가 일어나고 경제적으로도 이미 실패한 정책으로 국민의 반감을 사게 됩니다. 

이에 유신 체제를 반대하는 정치가와 학생들, 시민들을 "긴급조치"의 미명하에 계속적인 탄압을 하게 됩니다.


*긴급조치란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2년 제정한 유신헌법 53조를 바탕으로 1~9호까지 발령됐다.

박정희 정권은 법률적 효력을 부여한 긴급조치를 통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정지시키고 군사독재를 강화했다. 

1974년 1월 8일 선포된 긴급조치 1호는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비방하는 행위와 이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타인에게 알리는 언동을 금지했다. 

긴급조치 2호는 깁급조치 위반 사건을 일반법원이 아닌 군법회의에서 재판하도록 했다. 

1974년 이후 긴급조치 1.3.4.9호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은 사람만 589개 사건에 140명에 이른다. 

9호까지 발동된 긴급조치는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 전대통령이 사망하고 신군부의 주도로 1980년 10월27일 

헌법이 개정되면서 폐지됐다. [출처-다음백과사전]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헌법상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한 유신헌법의 개정에 대한 저항운동이 사회 각계각층에서 일어납니다. 

하지만 유신정부는 이러한 민주주의 우동을 강력하게 탄압하게 되는데

대통령이 발동한 "긴급조치"라는 구호 아래 국민과 정치가, 학생들의 인권을 박탈, 억압합니다. 



다음으로 경제적 측면에서 당시의 상황을 바라보면 중화학 공업 정책은 세계적인 불황과 함께 무리한 투자와 정책으로

이미 경제는 심각한 상태에 빠진 모습입니다. 

부마항쟁은 이러한 정치, 경제, 사회적 요인에 의해서 부산의 부산대학교의 학생들 시위로 시작하게 됩니다. 

시위가 급격하게 확대됨으로 인해서 당시 정부에서는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합니다. 

탱크와 장갑차, 그리고 시내에서는 공수부대가 착검까지 하는 상황으로 시민들이 도로변으로 한 발짝이라고 나오게 되면

개머리판과 곤봉으로 사정없이 구타하여 당시 머리부분을 다친 시민들의 수가 1000여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무죄한 시민들과 학생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에 다쳤을까요?


이렇게 부산 지역은 계엄군에 의해서 10월 18일 항쟁이 진압되었고 마산으로 번진 항쟁은 18일 부터 20일까지 

경남대학교 학생들에 의해서 격렬하게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유신 정부는 마산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다시 군대에 의해 시민과 학생들의 민주항쟁을 강제 진압하게 됩니다. 



이렇게 부마항쟁은 끝이나게 되는데 결과적으로는 유신 독재정권의 막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유신 정권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학생과 시민들의 힘을 받아 이루어졌고 국민의 염원이 표출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로써 부마항쟁은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10.26 정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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