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 .유신정권에 대항하다


국정농단을 일으킨 박근혜 대통령이 어제 날짜로 탄핵이 되었습니다. 

최순실과 그의 부역자들에 의해서 이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부분에서 큰 혼란이 있었고

국민들 마음에도 큰 상처가 생겼습니다. 오늘 이것을 계기로 해서 대한민국이 더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은 과거 정권의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부마항쟁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부마항쟁의 배경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16일, 부산에서 학생들에 의해서 일어난 유신 정권에 대한 민주화 항쟁입니다. 

처음에는 학생들에 의해서 시작이 되었지만 당시 이러한 반유신 정권에 대한 시위는 시민들에게도 호응을 얻어

대규모 반독재 민주 항쟁이 되었습니다. 


당시 부산 지역에서는 10월 16일부터 18일까지 항쟁이 지속되다가 정부의 계엄령으로 계엄군에 의해서 진압이 되었으며,

마산으로 번진 항쟁은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이어졌지만 정부의 위수령 발령으로 군대가 주둔하면서 학생과 시민들의 

민중항쟁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 위수령

군병력의 주둔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지역에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치안과 수비,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2. 부마항쟁의 원인


가장 큰 원인으로는 당시 정치적으로 봤을 때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체제를 들 수 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계속적인 정권 유지를 위해 유신 헌법을 내세우고 1인 독재체제를 유지합니다. 이것에 반대 또는 비판하는 

분위기가 일어나고 경제적으로도 이미 실패한 정책으로 국민의 반감을 사게 됩니다. 

이에 유신 체제를 반대하는 정치가와 학생들, 시민들을 "긴급조치"의 미명하에 계속적인 탄압을 하게 됩니다.


*긴급조치란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2년 제정한 유신헌법 53조를 바탕으로 1~9호까지 발령됐다.

박정희 정권은 법률적 효력을 부여한 긴급조치를 통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정지시키고 군사독재를 강화했다. 

1974년 1월 8일 선포된 긴급조치 1호는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비방하는 행위와 이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타인에게 알리는 언동을 금지했다. 

긴급조치 2호는 깁급조치 위반 사건을 일반법원이 아닌 군법회의에서 재판하도록 했다. 

1974년 이후 긴급조치 1.3.4.9호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은 사람만 589개 사건에 140명에 이른다. 

9호까지 발동된 긴급조치는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 전대통령이 사망하고 신군부의 주도로 1980년 10월27일 

헌법이 개정되면서 폐지됐다. [출처-다음백과사전]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헌법상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한 유신헌법의 개정에 대한 저항운동이 사회 각계각층에서 일어납니다. 

하지만 유신정부는 이러한 민주주의 우동을 강력하게 탄압하게 되는데

대통령이 발동한 "긴급조치"라는 구호 아래 국민과 정치가, 학생들의 인권을 박탈, 억압합니다. 



다음으로 경제적 측면에서 당시의 상황을 바라보면 중화학 공업 정책은 세계적인 불황과 함께 무리한 투자와 정책으로

이미 경제는 심각한 상태에 빠진 모습입니다. 

부마항쟁은 이러한 정치, 경제, 사회적 요인에 의해서 부산의 부산대학교의 학생들 시위로 시작하게 됩니다. 

시위가 급격하게 확대됨으로 인해서 당시 정부에서는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합니다. 

탱크와 장갑차, 그리고 시내에서는 공수부대가 착검까지 하는 상황으로 시민들이 도로변으로 한 발짝이라고 나오게 되면

개머리판과 곤봉으로 사정없이 구타하여 당시 머리부분을 다친 시민들의 수가 1000여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무죄한 시민들과 학생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에 다쳤을까요?


이렇게 부산 지역은 계엄군에 의해서 10월 18일 항쟁이 진압되었고 마산으로 번진 항쟁은 18일 부터 20일까지 

경남대학교 학생들에 의해서 격렬하게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유신 정부는 마산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다시 군대에 의해 시민과 학생들의 민주항쟁을 강제 진압하게 됩니다. 



이렇게 부마항쟁은 끝이나게 되는데 결과적으로는 유신 독재정권의 막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유신 정권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학생과 시민들의 힘을 받아 이루어졌고 국민의 염원이 표출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로써 부마항쟁은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10.26 정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Recent posts